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반도체기업을 대상으로 520억 달러(약 63조 원)에 이르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 지원법안의 통과를 앞두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안정적 반도체 수급을 위해 미국정부가 적극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반면 삼성전자나 대만 TSMC 등 해외 반도체기업을 굳이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맞서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현지시각으로 27일 “미국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생산공장 건설을 지원해야 하는지, 또는 시장에 이를 자율적으로 맡겨야 하는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미국 의회를 통과한 반도체 지원법안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및 연구개발 투자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으로 조정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원과 하원 동의를 모두 거치면 시행된다.
그러나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는 해당 법안의 필요성을 두고 여러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대표적으로 조지타운대 소속 반도체 관련정책 전문 연구원 윌 헌트와 씽크탱크 케이토인스티튜트의 스콧 린시컴 경제무역학부장의 의견을 전했다.
윌 헌트는 미국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안이 여러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바라봤다. 미국이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 반도체 공급을 대부분 의존하는 상황을 크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반도체가 지정학적 리스크에 놓여 있다며 당장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과 세계의 반도체 확보에 큰 차질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바라봤다.
세계 시스템반도체 공급량의 3분의2 이상, D램의 절반 이상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급되는 만큼 잠재적으로 최근 일어난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겪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윌 헌트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대만이나 한국에 대응하려면 미국도 적극적으로 지원금을 제공해 반도체기업들의 생산 투자를 유치하는 일이 필수라고 주장했다.
특히 TSMC와 같은 기업의 반도체공장 건설은 애플과 엔비디아 등 미국 주요 고객사의 안정적 반도체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반도체 지원법안 통과가 필요한 근거로 꼽혔다.
그는 미국정부가 반도체 투자 및 연구개발 지원금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미국 내에서 우수한 반도체 전문인력을 대거 육성하는 효과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스콧 린시컴은 반도체 지원법안에 명확하게 반대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 반도체산업이 이미 충분히 성장하고 있는 데다 대부분의 반도체기업들은 미국정부의 지원금이 없어도 미국에 공장을 설립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삼성전자와 TSMC가 최근 미국 반도체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사례를 예로 들며 이들 기업이 스스로 이해관계에 따라 투자를 결정한 것이라고 바라봤다.
반도체기업들도 지정학적 리스크 해소를 위해 반도체 생산공장을 여러 곳에 분산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는 만큼 미국정부에서 지원금을 제공할 이유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린시컴은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은 아시아에 반도체공장을 몰아두는 일에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 직접 비용을 들여 미국 등 지역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라며 “미국정부 지원이 없어도 투자할 요인이 크다”고 분석했다.
미국정부가 막대한 지원금을 제공하더라도 반도체 공급과 관련한 지정학적 리스크에서 벗어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원 법안의 효율성과 관련한 의문으로 제시됐다.
현재 반도체기업들이 미국에 공장 투자를 시작한 뒤 본격적으로 생산라인을 가동하는 시기가 2027년까지 늦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문제가 되는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들이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며 “미국공장 투자에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반도체기업들의 주장에 의회가 놀아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약 20조 원을 들여 텍사스주에 대규모 시스템반도체 공장 투자를 결정했다. TSMC와 인텔도 각각 수십 조 원을 투자하는 미국 내 반도체공장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 반도체 지원법안이 통과되자 이들 기업의 미국공장 투자 결정에 속도가 붙은 만큼 사실상 미국정부의 지원을 노려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일각에서는 반도체 지원법안이 미국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시각을 보였고 일부는 전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첨예하게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