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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 유명한 ‘신경영선언’을 하면서 했던 말이다.
삼성그룹 안팎에서 최근 이를 패러디해 ‘자식과 마누라 빼고 다 팔아라’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전면에 나서면서 자식(전자)과 마누라(금융)를 제외하고 비핵심 사업과 자산을 모두 팔아치우고 있는 것을 빗댄 것이다.
삼성그룹 사업재편 움직임이 올해 들어서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지난해 말 삼성카드 매각설에 이어 이번엔 제일기획이 매각설에 휩싸였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하반기에도 사업재편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제일기획이 지난해 말 삼성라이온즈 지분을 사들여 전 스포츠구단을 총괄하게 되면서 여러 추측이 수그러드는 듯했다.
그런데 제일기획 매각 추진설이 외신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오리무중의 상황에 놓였다.
제일기획 매각설은 왜 반복해 나오는 것일까?
◆ 제일기획 매각설에 주가 급락
제일기획 주가는 17일 전일보다 11.08%(2200원) 급락한 1만7650원에 장을 마감했다. 제일기획이 세계 3위인 프랑스 광고사 퍼블리시스에 매각이 추진된다는 외신 보도가 전해진 데 따른 것이다.
제일기획은 이날 매각설과 관련 “아직 구체화된 바가 없다”면서 “주요 주주가 글로벌 에이전시들과 다각적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도 삼성 수요사장단협의회 참석에 앞서 “확인되지 않았고 나도 잘 모른다”고 답변했다.
제일기획 지분은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삼성카드, 삼성생명 등 계열사가 28.44%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계열사들이 보유한 지분을 일괄 매각해 경영권을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제일기획 매각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월에도 블룸버그 등 외신들이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 지분 30%를 공개 매수를 추진할 수 있다고 보도한 적 있다.
삼성그룹은 말을 아끼고 있지만 매각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업계는 파악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일기획이 삼성그룹 품 안에 남든 그렇지 않든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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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 매각설 왜 되풀이 되나
제일기획 매각설의 1차 진원지는 이재용 부회장인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은 이재용 체제가 본격화하면서 실용주의 혹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치 아래 숨가쁘게 사업재편을 진행해왔다.
2014년 말 방위산업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지난해 화학계열사를 롯데그룹에 모두 넘긴 데 이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해 통합 삼성물산 시대를 열었다. 또 지난해 삼성생명 사옥 등 자산 매각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이 부회장이 ‘포스트 이건희’ 시대 삼성그룹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진다. 핵심은 전자와 금융, 바이오를 3각 편대로 삼을 것이란 점이다. 과거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해왔던 것에서 완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세대와 단절을 위해 비핵심 사업에 대한 처리가 과제로 남게 됐다. 제일기획 매각설도 삼성카드나 보안관련 계열사인 에스원 매각설 등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란 얘기다.
제일기획은 자타공인 국내 광고업계 시장 1위 사업자다. 제일기획은 설립된 지 40년이 넘은 데다 광고 뿐 아니라 미디어서비스, 프로모션 등에서 굳건한 위상을 지켜왔다.
서울 본사를 비롯해 전세계 40개국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도 보유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나 마케팅 등 제일기획 내부 인력의 가치나 노하우도 단순 지분가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삼성그룹이 실제로 제일기획 지분과 경영권을 매각할 경우 이는 이재용 시대 삼성의 새판짜기가 예상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강도높게 추진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삼성카드 매각설만 해도 업계 1위 사업자가 아니라는 점, 신용카드 사업 자체에 대한 미래 불확실성, 삼성전자가 추진하는 삼성페이와 사업적 중복 등 여러 측면에서 매각설이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제일기획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제일기획은 시장점유율 뿐 아니라 광고업계에서 유무형의 독보적 위상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일기획 매각 추진 관련해 해외 기업이 오르내리고 있는 점도 이례적인 일이다. 삼성그룹이 미래 사업구상과 관련해 밑그림을 그리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해외 매각도 추진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실현 가능성과 경우의 수
증권가에서 제일기획의 올해 사업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신영증권은 최근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사업에 한계에 직면한 점을 들어 제일기획도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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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 |
제일기획은 지난해 4분기에 영업이익 338억 원을 거둬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영업이익이 13.4% 줄었다.
제일기획은 지난해 매출 2조8067억 원을 올려 현대차그룹 광고계열사인 이노션의 9879억 원보다 3배가 많았다.
하지만 성장 속도를 놓고 비교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노션은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32.7%, 11.3%에 늘어난 반면 제일기획은 5.3%, 0.4%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런 속도라면 2위 광고회사인 이노션이 제일기획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승호 신영증권 연구원은 최근 “이노션의 경우 현대ㆍ기아차의 글로벌 신차광고를 기반으로 ‘유기적 성장(Organic Growth)'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반면 제일기획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이 한계에 직면해 유기적인 성장이 다소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제일기획 매각이 실현될 경우 가능한 경우의 수는 대략 3가지로 보인다.
첫째 삼성그룹이 약 30% 가량에 이르는 제일기획 보유지분 전량을 팔고 경영권도 넘기는 것이다. 이 경우 제일기획이 보유한 삼성그룹 계열사 물량이 매각협상에서 주요 관건으로 떠오를 수 있다.
또 퍼블리시스가 지분 일부를 사들여 1대 주주로 올라서고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2대 주주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퍼블리시스에 지분 일부를 파는 한편, 유상증자를 실시해 삼성그룹 계열사 혹은 이재용 부회장 등 오너가 지분 참여를 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제일기획은 삼성그룹과 사업적 측면에서 완전한 결별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제일기획의 최대 광고주인 삼성전자 때문이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세계 3위 광고회사인 퍼블리시스가 제일기획 지분 보유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삼성전자 광고 물량과 중국 디지털 광고시장 진출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김회재 대신증권 연구원은 17일 삼성그룹이 제일기획을 매각하려는 것이 아니고 글로벌 광고대행사인 퍼블리시스가 지분을 인수하려는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했다.
김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해외 TV 광고 가운데 일정부분을 퍼블리시스 자회사 스타콤(Starcom)이 담당하고 있다”며 “퍼블리시스가 지분을 인수하려는 것은 삼성전자 해외 매체 대행 물량을 늘리기 위한 의도”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