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병서 동덕여대 명예교수가 11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해 말하고 있다. |
“삼성, 국세청,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시가 타협해 서울을 대표하는 새로운 미술관을 건립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한국문화경제학회장을 지낸 최병서 동덕여대 명예교수가 11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해 한 말이다.
타계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이른바 '
이건희 컬렉션'을 공공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리 컬렉션은 개수로 따지면 1만2천여 점, 전체 감정가는 1조5천억 원에서 3조 원에 이르는 규모로 추산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오너일가는 주식, 부동산과 같은 이 전 회장의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 12조 원에 이르는 막대한 상속세를 물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이건희 컬렉션에 관한 상속세도 더해지면 상속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최 명예교수는 물납제가 삼성가가 막대한 상속세 부담을 해결하면서도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바라봤다.
아직 물납제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 명예교수가 삼성에 제안한 간접적 해법은 이렇다.
먼저 삼성은 국세청과 협의해 상속대상인 미술품을 출연한다. 정부는 이를 문체부나 미술계가 평가한 감정가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기준으로 구매한다. 이후 서울시가 부지를 제공해 새 미술관을 짓는다.
최 명예교수는 삼성이 이처럼 공공을 위한 미술관 건립에 협조하게 되면 미술관 명칭, 운영방침, 운영 인력 등 여러 면에 삼성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최 명예교수는 “미술관의 필수요건은 공공성과 개방성, 접근성인데 삼성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이 그런 사회적 역할을 잘 해왔는지는 회의적이다”며 “삼성가가 부담해야 할 엄청난 상속세를 재난지원금 같은 형태로 소진할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만한 미술관으로 보존할지는 공공 선택의 문제다”고 말했다.
다만 물납제 추진과 삼성가 상속세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물납제는 말 그대로 세금 대신 물건을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은 현재 상속세와 재산세에 관해서만 제한적으로 물납제를 운영한다. 물납 대상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으로 한정된다.
이날 세미나는 물납제를 확대해 미술품을 세금 대신 납부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한국고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 한국화랑협회 등 주요 미술계 단체가 주최했다.
미술품 물납제는 여러 해 전부터 미술계에서 화두가 됐다. 하지만 이번 세미나는 특히 많은 관심을 받았다. 교당 내부에 마련된 좌석 대부분이 찼고 방송국 등 언론 취재진을 포함해 100여 명이 세미나를 지켜봤다. 물납제와 연관된 삼성 오너일가 상속문제 및
이건희 컬렉션의 규모가 시선을 끌어모은 것으로 보인다.
물납제가 실제로 도입될지는 아직 안갯속이다.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지난해 10월 발의돼 현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정부가 미술품을 세금 대신 받는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가치 평가기준 마련, 관련 조직 설립 등 여러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치 있는 미술품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조세 형평성도 논란이 될 수 있다.
▲ 이광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 11일 열린 ‘문화재 미술품 물납제 도입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해 말하고 있다. |
최 명예교수와 함께 발제자로 나선 이광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 교수 겸 미술경제연구소장은 이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물납제가 꼭 필요하다고 봤다.
이 이사장은 한국이 문화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물납제를 통해 미술품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주요 미술품을 공공자산으로 만들면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납제를 이미 도입한 프랑스, 영국, 일본이 미술품 보유량을 늘리면서 국민의 문화적 접근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서 교수는 물납제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했다. 최근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는 만큼 물납제를 도입해 비교적 저렴하게 미술품을 구입하면 향후 이익이 클 것으로 내다봤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살바토르 문디는 2013년 7500만 달러에 낙찰됐는데 2017년에는 4억5031만 달러에 팔렸다. 국내 작가 김환기씨의 작품 최고가는 2005년 7억 원에 못 미쳤지만 2019년 132억 원을 보였다.
그동안 국내 미술관들은 이런 미술품들은 확보하는 데 큰 돈을 들이지 못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2019년 한국 전체 미술관이 미술품 구입에 투자한 금액은 228억 원에 불과하다.
이건희 컬렉션 가치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이 이사장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부가가치가 국내 자동차 5개사의 3년치 매출에 이른다는 일설도 있지 않느냐”며 “물납제를 두고 특정 그룹을 옹호한다는 말은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발제자들은 물납제가 도입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평가기준이 필요하다는 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공적 감정평가위원회를 설립해 민간 감정평가기관의 의견을 조율하는 방안, 감정평가사 인력을 확충하는 방안, 감정평가사 자격을 엄정하게 심사하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양의숙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의 수집에 기여해 온 개인이나 기업에게 긍지와 희망을 줘야 할 때다”며 “상속세의 물납제는 사익과 공익을 균형 있게 조화킬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