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임종룡 금융위원장 |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들이 고사위기에 처해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해운 물동량 감소와 수년 동안 지속된 중국 조선회사들의 저가수주 공세로 이미 상당수의 중소형 조선업체들이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있는 중소형 조선회사들도 대부분 자율협약, 워크아웃, 법정관리 등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중소형 조선회사들이 주로 만드는 상선분야는 시장가격이 원가 이하로 내려간 지 오래다. 배를 건조하면 할수록 오히려 손해가 쌓이는 현실이다.
이 때문에 중소형 조선회사들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최근 위기의 조선업종을 놓고 의미있는 발언을 했다.
임 위원장은 "개별기업이 아닌 산업별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조선업을 구조조정이 필요한 업종으로 지목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산업별 구조조정 법안들과 맞물려 국내 조선산업에 대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국내 조선회사들을 사실상 관리하고 있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은 합병 등 재편을 추진했으나 이해관계가 엇갈려 실패했다.
임 위원장이 조선업종의 재편을 추진할 수 있을까?
◆ 늪에 빠진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들
중국 조선회사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저가공세를 무기로 중소형 상선시장을 독차지했다. 이 때문에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들은 단가를 맞추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는 2007년만 해도 27개였으나 지금은 한진중공업, STX조선해양, 성동조선해양, SPP조선, 대한조선, 대선조선 이렇게 6곳이 남았다.
이 가운데 한진중공업을 제외하고 5곳은 장기간 계속된 막대한 영업적자로 채권단 자율협약중이거나 법정관리중이다.
|
|
|
▲ 홍기택 산업은행 회장 |
그동안 국내 금융회사들은 이들 조선회사에 1곳당 많게 3조 원이 넘는 자금을 퍼부었다. 그러나 중소형 조선회사들은 계속되는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STX조선해양은 지난해 매출액 2조9986억 원에 영업손실 3137억 원을 기록했다. 채권단은 그동안 STX조선해양에만 3조 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했다.
성동조선해양도 지난해 매출 6969억 원, 영업손실 3395억 원을 냈다. 성동조선해양은 완전자본잠식에 빠진지 오래다. 채권단은 2010년 자율협약부터 5년 동안 2조 원을 지원했다.
STX조선해양 성동조선해양 SPP조선 대선조선 대한조선 등 5곳의 지난해 경영실적을 보면 매출 5조5142억 원에 영업손실 8341억 원이다.
지난해 조선업계 3위인 삼성중공업의 매출이 12조8791억 원인 점을 감안하면 개별기업으로 규모의 경제를 갖추지 못해 막대한 적자의 늪에 빠져 있는 셈이다.
◆ 국내 조선회사를 관리하는 국책은행들
조선회사는 특히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등 사실상 정부의 영향 아래 있는 은행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과 STX조선해양의 최대 채권자이자 채권자 대표로서 관리하고 있다. 또 산업은행은 법정관리중인 대한조선의 최대 채권자이자 최대주주로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올해 세 조선회사의 사장을 새로 임명했다. 대우조선해양 사장에 정성립 STX조선해양의 사장을, STX조선해양의 대표이사에 이병모 대한조선의 사장을, 대한조선의 사장에 한성환 대우조선해양 전무를 각각 임명했다.
이런 산업은행의 인사는 돌려막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산업은행이 세 회사를 통합해 관리할 수 있다는 현실도 보여줬다.
수출입은행은 성동조선해양과 대선조선을 관리하고 있다. SPP조선도 최대 채권자는 수출입은행이지만 사실상 또 다른 정부은행인 우리은행이 채권자 대표로서 관리하고 있다.
국내 조선회사들은 실질적인 오너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우리은행으로 한 발 더 나아가서 보자면 정부인 셈이다. 따라서 채권단이 조선업체들에게 지원하는 자금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세금일 수밖에 없다.
◆ 치킨게임 벌이는 글로벌 조선업계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들은 주로 벌크선으로 대표되는 중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기업들이었다. 벌크선은 곡물이나 광석과 같은 비포장화물을 운송하는 선박을 말한다.
|
|
|
▲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
벌크선은 화물선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지만 비교적 만들기 쉬운 배로 꼽힌다. 철판을 용접해 수납공간을 만든 다음 엔진만 달면 되기 때문이다.
기술력의 차이가 거의 없기에 중국이나 동남아조선소에서도 어느 정도 기술이전만 된다면 국내조선소가 만드는 것과 비슷한 품질로 만들 수 있다.
중국 조선회사들은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2000년대 후반부터 벌크선 같은 중소형 상선시장을 독차지했다. 이 때문에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들은 원가를 맞출 수가 없어 지금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최근 중국 조선회사들끼리도 출혈경쟁을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을 '치킨게임'으로 보고 있다. 살아남는 자가 최종승자가 되는 상황에서 막대한 영업적자를 보면서도 버티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조선회사들은 이런 시장상황을 맞아 합병을 통해 몸집을 물리고 원가절감과 경영효율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들은 규모가 커질수록 매출과 자본이 늘어나 장기간 버틸 체력이 마련되는 효과도 노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미쓰비시중공업과 이마바리조선이 2013년 액화천연가스(LNG) 선박 부문을 떼어내 통합하면서 LNG전문 조선소 'MI LNG'를 출범시켰다. 지난해 IHI마린유나이티드와 유니버설조선이 합병해 재팬마린유나이티드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국영조선소 통폐합을 주도하고 있다. 2010년 3천여 개였던 중국 조선소는 현재 300여 곳 정도로 줄어들었다.
국내에서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나서서 몇몇 조선업체들을 합병하는 그림이 거론돼 왔다.
수출입은행이 관리하는 성동조선해양을 우리은행이 관리하는 SPP조선이나 산업은행이 관리하는 STX조선해양과 합병을 추진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삼성중공업이나 한진중공업이 성동조선해양을 2년 정도 위탁경영한 다음 인수하는 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관계자는 "수많은 방안 중의 하나로 논의되고 있을 뿐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중소형 조선회사의 부실문제를 더 이상 개별기업의 문제로 바라봐서 안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산업별 관점에서 정부주도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
◆ 임종룡, 정부주도 구조조정 이끌 수 있나
한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민간기업을 정부가 임의로 구조조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소형 조선회사들이 대부분 국책은행들의 관리를 받고 있는 현 상황을 두고 정부 주도하에 조선업 구조조정을 이룰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
|
▲ 임종룡 금융위원장 |
임종룡 위원장도 정부 주도의 조선산업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언급했다. 임 위원장은 "해당 업종의 경영상태가 어려울 때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며 지금이 구조조정을 위한 최적의 시기임을 강조했다.
임 위원장은 또 "특정 조선업체를 채권단이 살렸는데 그 조선업체가 회복한 경쟁력으로 저가수주 경쟁에 뛰어들면 나머지 회사들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임을 지적했다.
국내 조선업계는 정부 주도 아래 구조조정을 한 전례가 있다. 국내 조선업계는 1970년대 급속히 성장했지만 1983년 이후 세계적 조선불황에 따라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재무구조가 매우 취약했다.
정부는 조선회사들의 연쇄도산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1982년 '해운산업 합리화조치'에 이어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로 정부 주도 아래 강제적 구조조정을 유도했다.
이런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당시 논란이 됐으나 2000년대 한국이 세계 조선업계 1위에 오르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당시 사무관으로서 이런 일을 담당했다. 임 위원장의 발언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위원회도 최근 임 위원장의 산업별 구조조정 발언에 발맞추어 기업구조조정촉진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개정안은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협의회 구성원 50% 이상의 동의를 받으면 금융감독원이 채무조정과 신용공여 계획에 대한 중재안을 낼 수 있다. 즉 금융감독원이 기업구조조정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기획재정부도 최근 '사업재편지원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기업 간 인수합병을 유도하는 법안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이승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