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롯데그룹 정책본부,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한때 재벌기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 ‘대기업의 청와대비서실’이라는 소리까지 얻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조직들이다.
재벌기업들은 과거 모두 이 컨트롤타워들을 통해 각 계열사의 사업영역을 조율하고 그룹 차원에서의 굵직한 인수합병 등 중요한 전략적 판단을 내리며 성장했다.
하지만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라는 달갑지 않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재벌기업들은 하나 둘씩 컨트롤타워를 역사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23일 재계에 따르면 재벌기업에서 ‘컨트롤타워’를 유지하고 있는 곳을 찾아보기 점차 힘들어지고 있다.
한화그룹은 5월에 그룹 경영기획실을 해체하는 경영 쇄신안을 발표하며 그룹을 총괄하는 조직을 없앤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의 뒤를 따랐다.
주요 재벌기업들이 짧게는 20년, 길게는 60년가량 운영해온 그룹 컨트롤타워가 사라지고 있다.
컨트롤타워의 '시조'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1959년에 만든 비서실이다. 이후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이 기획조정실을 만들었고, 선경그룹(현 SK그룹)과 대우그룹, 현대그룹, 효성그룹 등도 1970~1980년대 초에 비서실, 기획조정실과 유사한 업무를 하는 조직을 출범했다.
이들은 모두 경제 고속 성장기에 탄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벌기업들은 당시 모태기업의 성공을 발판 삼아 사업을 한창 다각화하는데 주력했는데 새 사업분야 진출 등을 결정하는 컨트롤타워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총수가 그룹의 성장을 위한 유망사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컨트롤타워는 신사업에 인력과 자본을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재벌기업의 외형 확장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컨트롤타워의 역할과 위상이 더욱 확대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당시 재벌기업들은 IMF 외환위기에 따라 부실해진 계열사들을 정리하고 생존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이를 주도할 조직으로 ‘구조조정본부’가 잇따라 출범했다.
부실기업 정리와 인력 구조조정, 인수합병 결정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다 보니 이들에게 주어진 권한은 갈수록 막강해졌다. 총수의 의중을 반영해 계열사 경영에 개입하는 일도 적지 않아 각 계열사의 이사회 기능이 유명무실해지기까지 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03년 “구조조정본부는 법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기구이면서도 계열사들에 지시를 내리고 경영에 간섭한다”며 '구조본'의 해체를 유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LG그룹이 2003년 가장 먼저 구조조정본부 해체를 선언했으며 SK그룹과 한화그룹, 롯데그룹, 삼성그룹까지 대부분의 재벌기업들도 동참했다. 하지만 대부분 ‘경영기획실’ ‘전략기획실’ 등으로 이름만 바꿨을뿐 컨트롤타워의 명맥을 계속 유지했다.
경영환경이 갈수록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컨트롤타워의 존재가 불가피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컨트롤타워는 각 계열사의 중복사업 등과 관련한 교통정리뿐 아니라 새 사업 투자 등에서도 확실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컨트롤타워가 그룹 경영과는 무관한 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삼성그룹의 X파일 사건이 대표적이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삼성그룹 측이 정치권에 불법 자금을 지원하려고 논의한 내용이 담긴 도청 테이프가 2005년 공개되면서 삼성그룹은 거센 후폭풍에 맞딱뜨렸다.
삼성그룹의 2인자인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장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불법자금 지원 등을 논의한 내용이 폭로되면서 삼성그룹은 2006년 컨트롤타워인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전략기획실을 만들었고 이 또한 2008년 없앴다.
하지만 삼성은 2년 뒤인 2010년 전략기획실을 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꿔 복원했다.
삼성그룹의 새 컨트롤타워는 박근혜-최순실 사건에도 개입했다. 최지성 미래전략실 실장과 장충기 차장 등이 최순실씨을 지원한 사실이 확인됐는데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뇌물을 제공하는데 그룹 컨트롤타워가 개입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미래전략실은 노조 와해 공작에도 관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결국 미래전략실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받아들여 2017년 초 미래전략실을 완전히 해체했다.
롯데그룹 정책본부도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과 같은 조직으로 제2롯데월드타워 건립 등 굵직한 경영 현안을 주도하는 등 컨트롤타워로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삼성그룹과 마찬가지로 경영과 무관한 일에까지 손을 뻗치면서 결국 해체 수순을 밟았다.
정책본부가 롯데그룹의 월드타워면세점 특허권을 취득하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측에게 로비를 주도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을 저지르는 비판을 받자 결국 신동빈 회장이 직접 정책본부를 없앴다.
한화그룹도 경영기획실을 운영하면서 김승연 회장 세 아들의 경영권 승계 밑그림을 그린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끊임없이 받기도 했다.
컨트롤타워를 이끄는 수장들에게 권한이 집중됐던 것도 숱한 논란거리였다.
컨트롤타워 수장은 오너에게서 직접 지시를 받고 이를 실행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에 다른 계열사 사장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이사회 권한을 수시로 넘기도 했다. 각 계열사 재무팀이 재무 성과를 보고할 때도 각 계열사 사장이 아닌 컨트롤타워 재무팀 임원에게 먼저 보고해야 했을 정도다.
이병철 창업주의 그림자로 불렸던 소병해 실장부터 이건희 회장을 보좌했던 이수빈, 현명관, 이학수 실장 등은 모두 그룹 내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측근으로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총수 일가의 비자금 조성이나 차명계좌 운용 등 그룹에 치명적 일이 알려졌을 때 이들은 모두 앞에 나서 총수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데 나서기도 했다.
재벌기업들이 컨트롤타워 해체 움직임을 보이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을 시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복합적 사안을 놓고 정확한 의사 판단이 중요해지는 경영환경을 고려할 때 결국 여러 계열사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방향을 제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5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현재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 등으로 쪼개진 소규모 미래전략실 시스템으로는 삼성이라는 거대 그룹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렵다”며 “이재용 부회장은 기존 미래전략실과 다른 새로운 그룹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 컨트롤타워가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컨트롤타워 부활이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재계 전문가들은 바라본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