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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 |
“나는 아직도 꿈을 꾼다.”
중국 부동산 재벌 완다그룹의 왕젠린(61) 회장의 말이다.
완다그룹은 부동산 기업에 그치지 않고 문화, 관광, 금융, 전자상거래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왕 회장은 거대한 완다제국을 이루겠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 “최고 부자가 되는 게 꿈은 아니다”
왕젠린 회장은 오랫동안 중국 최고의 갑부로 꼽혔다. 그는 올해 마윈 알리바바 회장에게 최고의 갑부 자리를 내줬다.
왕 회장의 꿈은 중국 최고갑부가 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왕 회장은 “나는 최고부자도 아니고 최고부자가 된다 한들 별 감흥이 없다”고 말한다.
왕 회장의 꿈은 완다그룹을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최고부자가 아니라 최고기업의 리더가 되는 것이 왕 회장의 꿈이다.
왕 회장은 “나는 아직도 꿈이 있다”며 “내 꿈은 완다그룹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류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 회장은 완다그룹이 총자산 1조 위안, 매출 6천억 위안, 해외매출 비중 20%가 달성될 때 퇴임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는 “아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완다그룹은 완커, 헝다그룹과 더불어 중국 3대 부동산기업으로 꼽힌다. 완다그룹은 부동산사업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부동산사업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최근 들어 왕 회장은 문화, 관광, 금융 및 전자상거래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데 온힘을 쏟고 있다. 왕 회장이 완다그룹의 성장주축이었던 부동산 개발사업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완다그룹은 문화사업 확장의 하나로 2012년 세계 최대 극장체인인 AMC엔터테인먼트 홀딩스를 26억 달러에 인수했다. 최근 잇따라 10개가 넘는 여행사들을 사들이며 관광사업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 바이두, 텐센트와 손잡고 전자상거래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왕 회장은 이를 통해 완다그룹의 영역을 확장하며 꿈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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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 |
◆ 모험가 왕젠린, 시장경제의 풍운아가 되다
왕 회장은 모험가적 기질이 강하다.
그는 “일생동안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며 “완다그룹을 망하게 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왕 회장은 1970년 16세 되던 해에 군에 입대했다. 1986년 중국정부의 병력축소 정책에 따라 전역하고 다롄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왕 회장은 1년 만에 출세가 보장된 공무원 자리를 내던지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가 사업에 뛰어들 때 경제개혁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넘어가고 있었다. 옛 도심을 재건하는 공사가 한창 벌어졌다. 왕 회장도 주택시장에 뛰어들어 다롄시 구도심의 재건공사를 맡았다.
당시 구도심의 판자촌을 개발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1제곱미터 당 1200 위안(21만3천 원)이었다. 그 시절 다롄시에서 제일 비싼 집이 1제곱미터 당 1100 위안에 팔리고 있어 다들 공사 맡기를 꺼려했다.
그런데 왕 회장은 이 공사를 맡아 집집마다 화장실을 설치하고 방범창을 다는 등 당시로서 혁신적 변화를 꾀했다. 그는 “요즘 화장실이나 방범창 같은 것들이 당연히 달려있지만 당시만 해도 큰 모험이었다”며 “하마터면 기율검사위원회(중국 공산당 감찰기구)의 조사를 받을 뻔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왕 회장이 개조한 주택들은 1제곱미터 당 1580 위안이라는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 주택들은 당시 다롄시에서 최고 분양가를 갱신했다.
왕 회장이 부동산 개발사업을 시작할 때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경제특구를 지정하고 경제개발을 할 때였다. 왕 회장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쪽 지방으로 눈을 돌려 광둥성으로 진출했다.
다롄에서 기반을 다졌던 왕 회장이 광둥성에 진출하는 것은 당시로서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왕 회장은 “다롄시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결국 지역업체로만 남게 됐을 것”이라며 “제대로 판단했다고 믿었기에 실행에 옮겼다”고 말했다.
왕 회장은 광둥성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완다그룹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도시들에 진출하며 부동산 개발사업을 확장했다.
그뒤 다른 업체들이 주택사업에만 몰두할 때 왕 회장은 상업용 빌딩의 성공 가능성에 주목했다.
완다그룹은 대규모 복합 쇼핑몰이라는 개념을 중국에 처음 도입해 완다플라자를 건설했다. 완다플라자는 대성공을 거뒀다. 완다플라자는 중국에서 100개 이상 운영되고 있다.
◆ “퇴임 뒤 빈곤 구제 활동을 하겠다”
왕 회장에게 중국의 ‘국민 시아버지’라는 재미있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의 외아들인 왕스총(26)이 ‘국민 남편’으로 네티즌 사이에서 떠오르면서 왕 회장에게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왕 회장은 베푸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왕 회장은 완다그룹을 설립한 뒤 26년 동안 모두 37억 위안(6384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2008년 쓰촨성 대지진 당시에도 가장 먼저 성금을 기부했다. 2010년 지진 재해지역에 학교를 세우기로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 회장은 2010년 난징시의 전통사찰인 대보은사의 재건기금으로 10억 위안을 쾌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왕 회장의 기부금액은 중국에서 개인이 기부한 가장 큰 액수다.
완다그룹은 중국 민영기업으로 이례적으로 7차례나 중화 자선상을 받기도 했다.
왕 회장은 퇴임 뒤 빈곤구제 활동에 나설 뜻을 비추기도 했다.
왕 회장은 “2020년이면 내가 66살이 되는데 그때쯤이면 퇴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빈곤구제 사업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며 “최소 20년은 일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비즈니스포스트 백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