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활동의 공과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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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은둔형 경영자로 꼽힌다. 형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한일경제협의회장과 전경련 회장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생활신조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로 알려졌다. 직원들은 “변변한 홍보용 사진 한 장 없어 오히려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복지재단 지원도 미인가 시설에 집중되기도 했다.
한국타이어 사장 시절에도 언론에 딱 한 번 인터뷰에 응했다. 당시 사진 기자가 인터뷰용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을 보고 “무슨 전문가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는가. 전문가이면 사진을 한 번만 찍으면 되는 것을. 필름만 그저 아깝게…”라고 말했다.
검소하다고 알려졌다.
국산 구두 한 켤레로 5년 이상을 버틴다고 한다.
직원들과 식당에 갔는데 신고 있던 너무 구두가 낡아서 직원들이 구두를 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해외 출장 때도 수행원을 두지 않고 다닌다. 숙소도 2급 호텔에 투숙한다.
꼼꼼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1998년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제품의 종류와 값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3만 원 하는 농경용 타이어에서 2백90만 원인 OTR타이어까지 다양하다”며 타이어의 족보를 줄줄 외우기도 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모든 일을 꼼꼼히 잘 챙기던 차남 조양래에게 사업이 안전한 한국타이어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조양래는 1978년부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로부터 한국타이어를 사실상 물려받아 독립경영을 시작했다. 한국타이어는 1984년 조홍제 창업주가 별세한 후 1985년 효성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했고 이후 국내 최대의 타이어업체로 성장했다.
특히 일찍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조양래는 “회사매출이 2천억 원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하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고 꾸준히 밝혀왔다.
1980년 전 해태제과 사장이었던 나웅배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자신은 회장에 올라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했다. 나 사장이 1981년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자 다시 경영권을 받았지만 1988년 손위처남인 홍건희 부사장을 단독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하며 다시 전문경영인체제로 복귀했다. 홍 사장은 한국타이어에 1982년 전무로 입사했는데 6년 동안 전문경영인 수업을 받은 셈이다.
1997년 말에는 홍건희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조충환 한국타이어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2007년에는 조충환 사장을 부회장으로 올리고 서승화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한국타이어는 전문경영인 체제 속에 국내 타이어업계 시장점유율 1위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타이어는 미국 유력 타이어 전문지인 '모던 타이어 딜러'가 집계한 ‘2006년 세계 타이어업체 순위’에서도 7위에 올랐다.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아들 3형제에게 서로 다른 글귀를 들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조홍제 회장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게는 숭덕광업(崇德廣業·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번창한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에게는 자강불식(自强不息·쉬지말고 노력하라), 조욱래 전 동성개발 회장에게는 유비무환(有備無患·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이라는 말을 남겼다. 3형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조홍제 회장은 자식들의 성격과 기질을 잘 파악했다고 평가받는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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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63년 효성물산에 입사했고 1968년 동양나일론 이사에 올라 1969년까지 재직했다.
1969년 한국타이어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국타이어와 인연을 맺었다. 1971년 한국타이어제조 전무이사로 승진했고 1977년 부사장, 1979년 사장에 올랐다.
1981년에 회장에 오르면서 사장에게 경영권을 맡기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했다. 나웅배 당시 사장이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민정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자 연말에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사장을 맡았다.
1988년 회장에 오르면서 경영권을 다시 전문경영인에게 넘겼다. 이후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다가 2012년 한국타이어가 기업분할을 하면서 24년 만에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대한타이어공협회 회장을 맡았다. 1990년 한국타이어 복지재단 이사장에 올라 지금까지 맡고 있다.
◆ 학력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앨라배마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조양래는 아버지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의 3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동생은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이다.
홍문자씨와 사이에서 2남 2녀를 뒀다. 홍 여사는 홍긍식 전 변호사협회장의 딸이다.
장남 조현식은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 대표이사 사장이다. 차동환 카이스트 교수의 딸인 차진영 씨와 결혼했다. 차 교수는 고 설경동 대한전선그룹 창업주의 둘째 사위다.
둘째 아들인 조현범 한국타이어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셋째 딸인 이수연와 결혼했다.
장녀인 조희경은 노정호 연세대 법학 교수와 결혼했다. 차녀 조희원은 재미교포와 살고 있다.
◆ 상훈
2012년 3월 외국 민간인이 헝가리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헝가리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한국타이어가 헝가리 투자 외국계기업 중 고용창출 효과 2위 기업으로 현지 경제발전에 기여한 데 따른 것이다.
1986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상훈
2012년 3월 외국 민간인이 헝가리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인 헝가리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한국타이어가 헝가리 투자 외국계기업 중 고용창출 효과 2위 기업으로 현지 경제발전에 기여한 데 따른 것이다.
1986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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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은 가정과 학교에서 교통안전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에 근본원인이 있다. 한국타이어는 향후 안전교육을 내실 있게 실시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2001년 안전생활실천연합회 기증식에서)
“전종업원들의 일치된 힘은 일찍이 한국전쟁 때 영등포 공장을 지켜냈으며 80년대 초 미국의 덤핑제소도 견딜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1998/08/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번 끼우면 10만km 이상 달릴 수 있는 타이어와 1년도 신지 못하는 운동화 중 어느 것이 비싸다고 생각하느냐.” (1998/08/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타이어 값이 너무 비싼 게 아니냐는 질문에)
“타이어산업은 자본과 첨단기술, 숙련된 제조인력이 조화를 이뤄야 비로소 경쟁력이 생긴다.”(1998/08/20,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국산타이어는 외산에 비해 품질면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가격도 40% 상 쌉니다. 외국에서는 이 때문에 국산제품에 대해 호응도가 높습니다.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일부 외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풍토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1982/12/2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 평가
나서는 것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은둔형 경영자로 꼽힌다. 형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한일경제협의회장과 전경련 회장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생활신조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로 알려졌다. 직원들은 “변변한 홍보용 사진 한 장 없어 오히려 어려움이 많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이사장을 맡고 있는 복지재단 지원도 미인가 시설에 집중되기도 했다.
한국타이어 사장 시절에도 언론에 딱 한 번 인터뷰에 응했다. 당시 사진 기자가 인터뷰용 사진을 여러 장 찍는 것을 보고 “무슨 전문가가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는가. 전문가이면 사진을 한 번만 찍으면 되는 것을. 필름만 그저 아깝게…”라고 말했다.
검소하다고 알려졌다.
국산 구두 한 켤레로 5년 이상을 버틴다고 한다.
직원들과 식당에 갔는데 신고 있던 너무 구두가 낡아서 직원들이 구두를 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해외 출장 때도 수행원을 두지 않고 다닌다. 숙소도 2급 호텔에 투숙한다.
꼼꼼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1998년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제품의 종류와 값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3만 원 하는 농경용 타이어에서 2백90만 원인 OTR타이어까지 다양하다”며 타이어의 족보를 줄줄 외우기도 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모든 일을 꼼꼼히 잘 챙기던 차남 조양래에게 사업이 안전한 한국타이어를 맡겼다고 전해진다.
조양래는 1978년부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로부터 한국타이어를 사실상 물려받아 독립경영을 시작했다. 한국타이어는 1984년 조홍제 창업주가 별세한 후 1985년 효성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했고 이후 국내 최대의 타이어업체로 성장했다.
특히 일찍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조양래는 “회사매출이 2천억 원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하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고 꾸준히 밝혀왔다.
1980년 전 해태제과 사장이었던 나웅배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자신은 회장에 올라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했다. 나 사장이 1981년 민정당 국회의원이 되자 다시 경영권을 받았지만 1988년 손위처남인 홍건희 부사장을 단독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하며 다시 전문경영인체제로 복귀했다. 홍 사장은 한국타이어에 1982년 전무로 입사했는데 6년 동안 전문경영인 수업을 받은 셈이다.
1997년 말에는 홍건희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조충환 한국타이어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2007년에는 조충환 사장을 부회장으로 올리고 서승화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임명했다.
한국타이어는 전문경영인 체제 속에 국내 타이어업계 시장점유율 1위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타이어는 미국 유력 타이어 전문지인 '모던 타이어 딜러'가 집계한 ‘2006년 세계 타이어업체 순위’에서도 7위에 올랐다.
고 조홍제 효성 창업주는 아들 3형제에게 서로 다른 글귀를 들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조홍제 회장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게는 숭덕광업(崇德廣業·덕을 숭상하면 사업이 번창한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에게는 자강불식(自强不息·쉬지말고 노력하라), 조욱래 전 동성개발 회장에게는 유비무환(有備無患·미리 준비하면 걱정할 것이 없다)이라는 말을 남겼다. 3형제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조홍제 회장은 자식들의 성격과 기질을 잘 파악했다고 평가받는다.
◆ 기타
롤스로이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최저가가 6억4000만 원인 롤스로이스 팬텀을 구입했다.
2011년 성북구 성북동에서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사를 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도곡동 자택은 공시지가가 60억 원에 달한다.
2013년 주가가 급등하면서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선정한 10억 달러 부자에 선정됐다.
2014년 연봉으로 28억4200만 원을 받았다. 급여 5억2300만 원, 상여 2억6200만 원, 성과금 5억5700만 원, 장기성과금 15억 원을 받았다.
한국타이어 지주회사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사외이사 3명을 전부 이른바 '모피아' 출신으로 채웠다. 사외이사 황원오, 민해영, 이용성씨는 모두 조양래와 경기고 동창들로 3명 다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며 재경부 관료 출신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을 맺으면서 한국타이어는 구설수도 많이 겪었다.
조양래의 형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부임하고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을 맺으면서 조양래와 한국타이어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차남인 조현범 사장은 장모인 김윤옥 여사에게 1200만원에 상당하는 에르메스 핸드백을 사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Who Is ?]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https://www.businesspost.co.kr/news/photo/201603/24681_36397_238.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