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마음] 상실과 애도를 연습하는 계절, 가을

▲ 질환의 형태가 아니어도, 가을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가을을 탄다’는 꽤 과학적인 표현이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9월이 되어도 한낮에 에어컨을 켜면서 언제쯤 여름옷을 정리해서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추운 날씨가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얼떨결에 10월이 갔다. 급하게 코트를 주섬주섬 꺼내어 입으며 길을 걸다보니 발밑에서는 어느 새 낙엽이 뒹굴고 있다.

계절은 연속적이면서도 대단히 비연속적이다. 조금 철지난 표현을 빌면, '깜빡이도 없이' 그렇게 가을이 또 왔다.

아주 어릴 때는 ‘가을을 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가을을 쓸쓸함과 사색의 계절이라는 식으로 묘사하는 글을 볼 때는 그저 진부하고 게으른 표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계절이 사람의 마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그 미세한 감정 변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를 아직 알지 못했다.

사실 ‘가을을 탄다’는 꽤 과학적인 표현이다. 가을에는 햇빛이 줄고 낮이 짧아진다. 그에 따라 세로토닌 분비가 감소하고,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이 증가한다. 

신체의 리듬이 바뀌면서 에너지와 집중력이 떨어지고, 기분도 이유 없이 가라앉기 쉽다. 그래서 가을이 시작되는 시점에 계절성 양상의 우울증이 잘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꼭 질환의 형태가 아니어도, 가을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가을은 여름의 활발함과 겨울의 고요함 사이에 놓인 일종의 전이기다. 결실의 계절인 동시에, 그 열매맺음 이후의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이 흔히 시작을 은유하고 겨울이 죽음을 은유한다면, 가을은 절정을 지나 죽음으로 걸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연스럽게 내면으로 향한다.

저녁 8시가 넘어도 밝던 바깥은 6시가 되기도 전에 어두워져 있다. 계절의 빛이 조금씩 사라질수록 마음의 그림자는 또렷해진다. 이것이 상실의 감각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무의식에 있던 상실을 의식화하여 인지하게 된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애도이다. 

사람마다 애도의 대상은 다르다. 어떤 이는 지나간 시절을, 어떤 이는 회복되지 못한 관계를, 또 어떤 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스스로의 욕망을 애도한다.

심리학적으로 애도는 상실을 자신 안에 통합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을 인정하고 앞으로의 삶은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이상하게,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아침에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바라보게 되고, 퇴근길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느긋해진다. 그냥 일단 살아있으면 된 거다. 살아있기 때문에 슬퍼할 수 있고 애도할 수 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면, 우리는 옆사람과 함께 옷을 여미면서 농담할 수 있게 된다. “깜빡이도 없이 또 겨울이 와버렸네요. 신이 한국인을 기어이 냉동만두로 만들려나 봐요.”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