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미국 관세협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우리 정부가 대미 현금투자액 총규모 2천억 달러와 연간 200억 달러 안팎을 지급하는 방안을 놓고 미국과 막판 조율에 나서면서다.
23일 정치권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한미 관세협상의 타결을 위한 핵심 관문은 대미 투자 펀드 가운데 ‘현금 투자 비중’을 얼마로 할 것이냐라는 관측이 나온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2일(현지시각) 워싱턴 델러스 국제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나 “많은 쟁점에 대해 양국 간의 의견이 많이 좁혀져 있는데 한두가지는 아직 양국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분야가 있다”고 말했다.
김 정책실장이 언급한 ‘한두가지 쟁점’ 가운데 핵심은 3500억 달러 대미투자액 가운데 현금투자 비중이다. 현금투자의 전체 규모가 정해져야 분할기간과 연간 지급액이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22일 공개된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통화스와프 체결보다는 투자 구조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구 부총리는 “통화스와프가 필요할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전적으로 어떻게 투자가 구성될지에 달렸다”며 “아예 필요 없을 수도 있고 소규모로 체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미투자 규모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통화스와프 체결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왼쪽)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상무부 청사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만난 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1년 사이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규모가 150억달러에서 200억달러 사이”라고 강조했다.
만일 200억 달러씩 10년 동안 투자하는 방안을 제안했다면 3500억 달러에서 직접 현금투자 비중은 2천억 달러가 되는 셈으로 약 57% 정도다.
한국이 2천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8년간 연간 250억 달러씩 분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말 만났던 한미 정상회담 당시 우리 정부는 현금 투자 비율을 최대 5% 수준으로 책정하고 나머지는 대출·보증 형태로 채울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은 전액 현금 투자를 약속한 일본 사례처럼 90% 이상을 현금투자하라고 압박해 왔다. 우리 정부는 2천억 달러 분할 지급을 현금투자의 마지노선으로 설정하고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20일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미국이 여전히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는가’란 질문에 “거기까지는 아니고 미국 측이 상당 부분 우리 의견을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며 "2천억 달러도 전액 현금 투자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이고 투자처 선정과 수익 배분을 어떻게 할지 등도 문제다"라고 말했다.
만일 정부가 미국과 현금투자 규모를 2천억 달러로 합의한다고 해도 '분할 기간'이 협상 타결에 걸림돌이 될 공산이 크다.
일본과 유럽연합(EU) 모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임기인 2029년까지는 투자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제안한 10년은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는 2029년 1월까지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관세협상을 정치적 성과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임기가 끝난 뒤까지 설정된 ‘납입 기간’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아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2일(현지시각) 워싱턴 DC의 상무부 청사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한미 관세협상 쟁점을 놓고 2시간 가량 협상을 벌였다. 이날 회담은 오는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전에 이뤄질 마지막 만남이다.

▲ 이재명 대통령이 2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자유홀에서 CNN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 정책실장은 협상을 마치고 나온 뒤 기자들과 만나 “남아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며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논의를 조금 더 해야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우리 정부는 물론 미국 측도 경주 APEC에서 한미 관세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2주 연속 만나면서 숨가쁘게 움직여왔다. 특히 관세협상과 관련된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한미 두 나라가 양해각서(MOU)를 작성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나 투자 금액을 명시한 문서화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장기 정치·경제적 상황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만큼 우리 정부에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석진 명지대햑교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CBS라디오 한판승부에서 “우리가 너무 APEC 날짜에 쫓겨가지고 (협상문을) 만들기 시작하면 우리 체력으로는 견딜 수 없는 딜이 만들어질 수 있다”며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느냐라고 하는 소송이 지금 진행 중이고 내년 11월에 있을 중간선거 등에서 트럼프의 힘이 빠질 여지가 있다”고 짚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관세협상 MOU 작성과 관련해 “APEC이라는 특정 시점 때문에 중요한 쟁점을 남긴 채 부분 합의만을 갖고서 MOU에 사인하는 방안은 정부 내에서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날 공개된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결국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서도 “조정 및 교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