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주요 이해관계자인 임직원의 고통분담은 필수불가결하다. 국민의 돈으로 고용안정을 추진한다면 해답은 국유화밖에 없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지원 과정에서 적용하는 원칙을 두고 이전보다 더 단호해진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회장은 이전부터 대주주와 사측의 고통분담이 지원에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는데 최근에는 쌍용차 지원 등 현안을 두고 노조를 겨냥한 압박 수위도 높이고 있다.
13일 산업은행 안팎의 관계자 말을 종합하면 산업은행이 기업 구조조정 방식에 대대적 변화를 꾀하면서 이 회장이 노조 반발로 기업 정상화에 어려움을 겪었던 과거와도 확실하게 결별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회장은 12일 온라인 신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업 구조조정과 지원에 관련한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국회에서 산업은행의 지원 대상 기업에 고용안정 및 촉진 의무를 부과하는 법안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금융지원을 제공하거나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고용보장을 이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고용보장을 위해 필요한 인건비 등 비용은 결국 세금을 들이는 일이고 인력 구조조정이 없다면 기업을 매각하기도 어려워져 결국 파산이나 국유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과거 구조조정 사례에서 주로 대주주와 사측의 희생을 강조해왔던 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이 회장은 과거 한진해운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주주인 한진그룹 일가가 팔을 하나 자르는 정도의 결단을 했어야 한다”며 자체적으로 자금 확보 등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결국 파산의 길로 접어들어 국내 해운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결과를 낳으면서 산업은행의 뼈아픈 구조조정 실패 사례로 남게 됐다.
한국GM과 HMM(옛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의 지원을 받은 뒤 노사관계 악화로 마찰을 빚으면서 경영 정상화에 악재를 안고 있는 점도 이 회장이 노조의 고통분담을 강조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한국GM 노조는 2018년에 산업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은 뒤에도 지난해까지 사측과 해마다 임금협상에 실패해 파업사태를 벌이면서 계속 마찰을 빚어 왔다.
이 회장이 2019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GM 임직원 평균연봉이 1억 원을 넘는다는 점까지 들면서 “파업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산업은행이 장기간 채권단 관리체계로 운영하던 HMM 역시 지난해 12월31일까지 파업을 논의하다 가까스로 사측과 합의했을 정도로 경영 정상화 과정에서 노사관계는 불확실성의 요소로 남아있다.
이 회장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쌍용차 지원방안과 관련한 질문에 “쌍용차 노조가 단체협약 주기를 늦추고 실적 개선 전까지 파업 등 쟁의행위를 하지 말아야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쌍용차 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쌍용차가 어디서도 지원을 받지 못 하고 파산의 길로 접어들 것이라며 매우 강경한 태도로 고통분담의 원칙을 내걸었다.
쌍용차 역시 오래 전부터 회생절차를 추진할 때 노조 파업 사례가 많았던 만큼 이 회장이 산업은행의 자금지원을 결정하기 전 분명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회장은 구조조정 기업에서 노조가 기업 정상화 이전에 파업을 하는 행위를 ‘자해행위’라고 표현할 정도로 강한 어조를 보였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수장을 맡고 있는 이 회장이 정부와 여당의 고용안정 기조에 약간 벗어나 노조를 향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조추천이사제 도입 등 노조의 권익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보장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장은 현실적 관점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고 회생 가능성을 높이려면 임직원도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며 소신을 꺾지 않고 있다.
다만 이 회장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놓고는 이미 상당한 인력 감축으로 고통분담이 이뤄졌다고 평가하며 합병 과정에서 고용보장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최근 들어 이 회장은 산업은행이 자금난을 겪는 기업에 금융지원을 제공한 뒤 채권단 관리체계로 운영하거나 직접 구조조정을 주도하던 과거의 구조조정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적 역할을 축소하는 쪽으로 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 산업은행이 채권단으로 있는 대부분의 자회사를 매각하거나 구조조정 전문 자회사로 이관하는 등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이 회장은 이런 과정에서 노조와 마찰로 기업 정상화에 차질을 겪었던 과거와도 확실하게 선을 긋기 위해 노조에도 엄격한 고통분담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고용안정이라는 명분보다 한계기업의 조속한 회생과 정상화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 셈이다.
이 회장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노조가 정부와 산업은행을 협박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용 최소화 원칙, 비용 대비 성과 극대화를 중점에 두겠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