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기자 hallow21@businesspost.co.kr2017-09-01 18: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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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이미지.
켄 로치 감독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지난해 칸 국제영화에서 생애 두 번째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영국 저소득층 시민의 실상을 폭로하면서 신자유주의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자체도 수작이지만 로치 감독이 남긴 칸 수상소감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열망으로 가득해 큰 반향을 불렀다. 여든 살의 노장감독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길기도 했거니와 청중을 향한 호소와 격정으로 수상소감이라기보다 정치연설에 가까웠다.
이런 말을 했다.
“영화는 많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의 전통은 ‘저항의 영화’, 강력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로치 감독이 스스로 했던 은퇴선언을 번복하면서 내놓은 작품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영화의 미덕을 훌륭하게 증명해 보인 셈이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한국영화 흥행사에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다. 역대 흥행 톱10 진입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택시운전사의 흥행은 올해 첫 천만 영화의 탄생이란 점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흥행수익 이상의 성과가 더욱 값진 것으로 보인다.
‘5월 광주’는 누군가에겐 아직도 가슴 아픈,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는 소재다. 지나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꽃잎’ ‘화려한 휴가’ 등 꾸준히 영화화가 시도됐지만 상업적으로 이 정도의 흥행을 거둔 것은 택시운전사가 처음이다. 대중적 성공이 낳은 사회적 파장 역시 그만큼 커 보인다.
발포명령자 처벌 등 정치권에서도 아직껏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로치 감독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택시운전사의 흥행이 던지는 메시지는 또 있다. 광주 이슈에 가려져 덜 주목받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한번쯤 짚어볼만한 대목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웠다는 점이다.
택시운전사는 타이틀이 말해주듯 의도치 않게 비극적 역사의 한복판에 서게 되는 소시민 김사복에 초점이 맞춰졌다. 송강호씨가 워낙 싱크로율 높은 연기를 해낸 덕분에 이런 측면이 더욱 극대화됐다.
하지만 영화가 던진 또 다른 사회적 의미망에서 보자면 주인공을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발전적 관계를 맺는 부차적이고 매개적인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 크레취만이 맡은 독일 국영통신사 소속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다.
영화 속에서 힌츠페터 기자가 광주 취재에 나서는 이유는 상세히 그려지지 않는다. 일본 도쿄에서 취재활동을 하다 우연히 광주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취재에 나설 결심을 하는 정도다.
그가 왜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한국에 잠입하고 사비(당시 10만 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 100만 원은 족히 될 듯한 액수다)를 들여가며 엄혹한 통제를 뚫고 목숨까지 위험할 수도 있는 시가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지 도통 설명이 없다. 실화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만큼 감독이 굳이 설명할 필요를 못 느꼈을 수 있다.
힌츠페터 기자는 나중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송건호언론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후일담일 뿐이다.
▲ 영화 '공범자들' 포스터.
짐작해보건대 힌츠페터 기자는 호기심이 남달랐던 점에서 좀더 기자정신이 투철했을 테고 그가 결과적으로 권력에 맞서는 언론자유의 정신을 실현하게 되는 건 처음부터 의도됐던 것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나쁜’ 권력에 대한 저항은 처음부터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더욱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분노가 쌓이는 만큼 저항의 힘도 더욱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MBC와 KBS 양대 공영방송사가 사상 처음으로 동시 총파업을 앞두고 있다. 기자와 PD, 아나운서 등 방송사 직원들이 왜 로비로, 거리로 나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영화 ‘공범자들’을 꼭 봤으면 한다.
택시운전사의 천만 관객 동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미 17만여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봤다. 다큐영화로는 드문 기록이다.
적어도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명박 정부 이후 지난 10년 동안 정치권력과 결탁한 언론의 민낯을 확인하며 강력한 권력에 저항하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될 듯하다.
1980년대 군부독재 당시 언론탄압이 물리적 폭력까지도 수반한 노골적이고 강제적이며 외부적인 것이었다면 수십 년이 흐른 지금은 내부자들의 자발적인 공모 아래 더욱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앞서 언급한 로치 감독은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외치자”며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택시운전사나 공범자들은 모두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입을 닫고 있을 때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외치는 이들의 저항이 담겨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