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BP금융포럼'에서 (왼쪽부터) 죠니에리 OJK 보험감독담당 실장, 인다르토 OJK 은행감독담당 부청장, 디안 OJK 은행감독담당 청장이 강석운 비즈니스포스트 대표의 개회사를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자카르타(인도네시아)=비즈니스포스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한국 예능을 좋아합니다.”
죠니에리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 보험감독부문 실장은 15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BP포럼에서 보험산업에 관한 OJK의 로드맵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 예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날 죠니에리 실장은 한국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와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며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보험시장은 다른 금융분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성장이 뒤처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 만큼 죠니에리 실장이 한국 금융사의 적극적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한국과 친밀감을 한껏 드러내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디안 에디아나 레이 OJK 금융감독청 은행감독담당 청장 역시 이날 국내 은행들에게 기회요인이 될 수 있는 사업 분야들을 짚으며 한국 은행의 더욱 적극적 역할을 요청했다.
디안 청장은 이날 포럼장에 늦지 않게 정시에 도착했는데 현지 법인장들에 따르면 OJK 고위인사가 행사에 늦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한다.
이날 행사가 OJK의 금융정책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인도네시아 진출한 국내 금융사의 법인장들이 한데 모인 만큼 행사 진행에 차질을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적극적 ‘구애’에도 국내 금융사가 인도네시아에서 가야할 길은 아직 멀다는 평가를 받는다.
KB금융그룹은 KB뱅크(옛 부코핀은행)를 중심으로 증권과 카드, 보험, 캐피탈 등이 연계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나 KB뱅크는 여전히 적자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화생명 인도네시아법인도 2019년 처음 순이익을 낸 뒤 조금씩 이익을 늘려가다 2022년부터 다시 순손실을 내고 있다.
한화생명은 현지 생명사와 손보사, 증권사에 이어 은행까지 인수할 채비를 하면서 국내 보험사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사업을 펼치는 곳으로 평가된다.
미래에셋증권도 거대 자본을 앞세운 현지 증권사의 수수료 인하 전략에 밀려 지난해 2020년부터 3년 연속 지킨 브로커리지시장 점유율 1등 자리를 내줬다.
▲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에 설치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초상화. 자카르타에서는 당선인이 아닌 조코위 대통령의 인기를 보여주는 입간판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조코위 전 대통령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비즈니스포스트> |
국내 금융회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인도네시아가 그리 만만한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금융산업은 화교와 일본계 자본이 꽉 잡고 있는데다 은행산업은 금산분리가 돼 있지 않고 이슬람금융의 영향력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각종 사업의 승인과 허가는 물론 사실상 국내 주재원의 인사권까지 쥐고 있는 금융당국의 강한 규제 또한 넘어야 할 산이다.
당장 이번 포럼만 살펴봐도 인도네시아 금융당국 인사들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디안 청장은 인도네시아에서 상시 경호를 받는 고위관료로 지난해 한국에서와는 달리 행사장에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을 여러 명 대동하고 나타나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디안 청장과 고위급 인사들이 앉을 ‘스페셜 의자’를 갑작스레 요청한 OJK 측의 태도에서도 국내 금융회사들이 겪을 업무상 어려움을 짐작케 했다.
인도네시아가 새 행정부 출범으로 금융정책의 변화가 이뤄질지 모른다는 점도 국내 금융회사들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포럼이 열리던 기간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엉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 도로는 새 대통령 프라보워 수비안토의 취임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당선인 프라보워뿐 아니라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그의 아들이자 차기 부통령에 오르는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까지 세 사람이 모습이 한 입간판에 들어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사이사이로 조코위 단독 초상이 들어간 입간판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조코위의 영향력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 있음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아세안 국가 가운데 민주주의 체제를 가장 잘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도네시아지만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오랜 독재를 거쳤던 만큼 대통령의 권위는 여전히 상당하게 느껴졌다.
▲ KB캐피탈과 KB손해보험 인도네시아법인이 입주해 있는 자카르타 사히드 수디르만센터 입구에 있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 사인. 사히드 수디르만센터는 2015년 완공된 건물로 2015년 만들어진 이 동판에는 '신의 은총으로'라고 적혀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대통령의 권위를 잘 보여준다. <비즈니스포스트> |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내 금융회사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국내 은행 6곳의 대출 규모는 8월 기준 103억9천만 달러(약 14조 원)으로 지난해 8월보다 31.5% 늘었다.
비 한국계 은행(Non-Korean Bank) 대출이 같은 기간 10.6%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빠른 증가세다.
국내 은행들은 OJK의 디지털 뱅킹 육성 정책에 발맞춰 현지에서 디지털 대출역량도 강화하고 있다.
국내 보험회사들도 아세안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자동차보험 비의무화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정책 변화에 대응해 자동차보험 판매를 확대할 채비를 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기업금융(IB)과 브로커리지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여신사(카드,캐피탈)는 자동차 할부와 중장비 리스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자의 영역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2박3일 일정의 포럼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차이는 한결 크게 다가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운동을 위해 조깅하는 사람을 빼고는 좀처럼 뛰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한국인들은 환승역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다.
일반 거리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낮잠을 자거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한국인들은 바쁘게 핸드폰을 바라보면 뛰는 듯 걸음을 옮겼다.
빠른 성과가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금융회사들의 느린 성과가 다소 아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속도의 차이일 뿐 국내 주재원들이 30도를 웃도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흘린 땀은 성과로, 느리지만 분명히 쌓여가고 있었다. 조승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