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점에서 팔지 않을 책을 엮은 일이 있다. 큰 가르침을 주고 갑작스레 돌아가신 고등학교 은사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 문집이었다. 선후배들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일이 자연스럽게 내게 맡겨졌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졸업 뒤 수십 년이 지나도록 선생님 댁을 드나들며 교유하던 선후배들에게는 창졸간에 당한 애통함을 담은 글을 쓰라고 주문했다.
필자는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분들과 인터뷰 글을 붙이고 추모 글 맨 뒤에 사진 등의 화보와 연보를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손을 대는 순간부터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끌어갈 자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군대 등 우리와 만나기 전의 굵직한 인생 변곡점을 담은 기록과 사진이 고향 본가의 화재와 함께 모두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소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말씀을 해오신 분답게 선생님은 당신을 아는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무지 출발점을 찾지 못하던 추모집 발간의 실마리는 선생님의 오랜 벗을 수소문해 인터뷰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같은 뜻을 모아 함께 모임을 만들며 교유해온 분이었는데 그 분은 당시 만들었던 회보의 창간호를 아직도 보관하고 계셨다. 50년도 더 지난 그 회보를 얻어 보며 몰랐던 그 분의 청년 시절과 초년교사 시절 모습의 일단을 파악한 것이다.
남겨진 기록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한 책의 최고봉으로 필자는 김창희 작가의 '아버지를 찾아서'를 꼽는다.
김 작가는 어느날 아버지가 남긴 수첩과 사진 꾸러미를 발견하고 이를 모티브로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그는 이 여정에서 조우한 사소한 인연과 사연들을 정갈하게 엮어 거대한 서사로 풀어냈다. 한 번 읽어볼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길게 사설을 늘어놓은 까닭은 개인적 감동의 경험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록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기억은 인간이란 존재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자연스레 파편화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때로는 그 기억을 편의에 따라 왜곡한다는 심리학의 연구결과도 있다.
어떤 정치인이 선거 무렵에 '기억 앞에 겸손하겠다'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했던데 만인이 겸손해야 할 대상은 기실 기억이 아니라 기록이다.
기억이 내재한 결정적 약점은 공유 또는 전달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지닌 지식과 경험, 철학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기록을 통해 실체를 얻어야 한다.
유네스코가 굳이 세계기록유산이란 걸 선정해 기리고 보존하려는 이유 역시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 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얘기를 기업경영에 맞춰 생각해보자.
기업의 실체가 사옥이나 공장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에는 이제 이견이 없는 듯하다. 그럼 한 기업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달라지게 만드는 에너지는 무엇일까.
바로 맡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지식, 문화, 기술이 그 조직 안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입에서 입으로 지식이 전해지는 도제식 교육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해도 이 전승의 핵심은 사내에 남아 있는 매뉴얼이 됐든 보고서가 됐든 또는 영상물이 됐든 '기록'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예외적 영역이 있다. 바로 유기체의 최고 우두머리인 경영자의 귀한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기껏해야 찾을 수 있는 최고 경영자의 기록이라고는 신년사, 어쩌다가 보도되는(그나마 요즘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 언론 인터뷰가 고작이다.
물론 경영자의 의사 결정 하나하나가 비밀에 부쳐질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매 상황과 여건이 다르니 한 번의 의사결정이 이후의 다른 의사결정에 직접적 전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 할 경영자들이 현직에서는 물론이고 퇴직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쉽고 아깝기만 하다.
기업의 존망이 달린 결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정됐는지를 살피는 스토리에 이른바 '시스템'만 남고 정작 사람은 빠져버린 꼴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책 발간 청탁을 위해 연락한 한 기업인은 "남기고 싶은 말은 회사에 다 남아 있다"는 말로 거절의 뜻을 전해왔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 것이리라. 나의 기록은 바로 이 회사라고. 조직과 나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그를 CEO 자리에 올려놓은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준거를 몸 담은 회사에 두면서도 정작 회사를 위한 활약이 10년에 한 번 발간되는 사사(社史)에 한 줄 표시되는 것으로(그나마 운이 좋으면) 매몰되는 것은 공허하지 않은가?
재직 당시의 주가, 매출 실적 같은 숫자가 당신의 청춘과 고뇌를 설명하는가? 조직을 이끈 비전과 철학, 번민의 시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권하건대 조직의 수장을 꿈꾸고 있거나 이미 그 자리에 있는 이라면 오늘부터라도 틈틈이 메모하고 생각을 글로 정리하시라.
회사가 연초에 나눠주는 다이어리에 날짜를 표시해놓은 것은 메모하기를 빼먹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다. 그리고 메모가 말을 걸기 시작하면 조용히 그 기록을 보며 내러티브를 꾸며보길 바란다.
식상한 관용구이긴 한데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속담은 바뀌지 않는 진리다.
당신이 끄적여놓은 포스트잇 한 조각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순간 흩어져 있던 자료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설명하는 살이 되고 당신이 꽤 괜찮은 삶을 산 경영자이자 인간이었음을 증거할 것이다.
위대한 자리에 올라서 더 이상 눈치 볼 일도 없지 않은가. 그만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온 당신이 쓰는 기록은 기억을 너머 이미 역사이고 작품이다.
누구에게 맡길 일도 아니다. 회사의 기록은 당신의 것이 아니니 당신이 해야 한다. [이강필 커리어케어 출판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