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현재 파운드리 투자를 진행하는 중국에서 사업을 정착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한 국제관계에 따른 위험이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 파운드리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는 충북 청주의 기존 파운드리공장 M8에 있는 반도체장비를 중국 우시의 신공장으로 이전하며 중국 반도체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올해 말까지 우시 신공장으로 장비 이전을 마무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청주에는 연구개발 기능만 남긴다.
박정호 부회장이 파운드리사업에 더 투자하겠다고 말한 내용으로 미뤄보면 SK하이닉스시스템IC가 앞으로 기존 장비를 옮겨가는 데 그치지 않고 새 장비의 확보를 추진할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 부회장은 21일 월드IT쇼 2021에 참석해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기업들이 대만 TSMC 수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서비스를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고 이에 공감한다”며 “파운드리에 많은 투자를 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다만 현재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기업들이 선뜻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갈등이 시각이 흐를수록 가열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중국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같은 최첨단 반도체장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제재해 왔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5나노(nm)급 이하 고성능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다. 다만 중국 반도체 미세공정의 수준이 아직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하는 단계에 미치지 못해 중국 전체 반도체산업에 이 제재가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에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뿐 아니라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에 관한 제재도 미국에서 검토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심자외선 노광장비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보다 기술 수준이 낮은 대신 더 폭넓은 공정에서 사용되는 만큼 중국 반입이 금지됐을 때 현지 반도체기업이 받는 타격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런 내용의 제재가 실제로 시행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하지만 미국 중국 갈등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도체 생산지로서 중국의 매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따라 박 부회장이 차선책으로 SK하이닉스의 본진인 한국에서 파운드리사업 확대를 단행할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한국에서는 사모펀드 투자를 통해 키파운드리(옛 매그나칩반도체 파운드리부문)에서 간접적으로 파운드리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 키파운드리를 인수한 사모펀드에 2500억 원가량을 투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키파운드리는 반도체시장 주류가 아닌 8인치(200mm) 웨이퍼 기반 파운드리사업을 한다는 점에서 박 부회장이 말한 ‘TSMC 수준의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가 자체적으로 12인치(300mm) 웨이퍼 기반 파운드리사업에 진출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SK하이닉스 이천 사업장이나 청주 사업장은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위해 300mm 웨이퍼를 다루고 있어 300mm 파운드리사업을 시작하기 용이한 환경을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이순학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매그나칩의 파운드리사업부를 인수했고 자체적으로 300mm 파운드리 기술도 확보해가고 있다”며 “파운드리산업의 중요도를 감안해 점진적으로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가 한국 반도체사업장에서 파운드리사업을 고도화할 경우 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에 따른 상승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극자외선 공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2월1일 준공된 이천 사업장 M16공장은 올해 하반기부터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활용해 4세대 10나노급(1α) D램 제품을 만들 것으로 예정됐다. 또 SK하이닉스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추가 확보하기 위해 앞으로 5년 동안 4조7500억 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 2월 준공된 SK하이닉스 이천 M16공장. 극자외선(EUV) 기술을 기반으로 차세대 D램을 생산한다. < 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가 이처럼 극자외선 공정 기반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파운드리사업에 활용할 방안도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애초 극자외선 노광장비가 메모리반도체보다 첨단 시스템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 분야에서 더 많이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 생산라인에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공유하면서 고정비 부담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박 부회장이 중국이나 한국 대신 전혀 새로운 파운드리 투자처를 꺼내들 수도 있다. 바로 미국이다.
앞서 이석희 SK하이닉스 각자대표이사 사장은 3월30일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미국에서 신규 연구개발거점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미국에서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반도체 자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개발거점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파운드리공장 등 반도체 생산시설 다변화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SK하이닉스의 반도체공장은 모두 한국과 중국에 몰려 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각국의 반도체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않다. 미국 의회는 반도체 시설투자에 최대 40% 수준의 세액공제를 지원하는 내용의 반도체 생산지원법안을 지난해 6월 발의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 법안을 시행하기 위해 370억 달러 규모의 예산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박 부회장이 중국, 한국, 미국 등 어느 장소에서든 단기간에 대규모 파운드리 투자를 발표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가 90억 달러(10조3천억 원) 규모의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아직 마무리짓지 않아 자금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투자하는 방안은 말 그대로 바닥부터 새로 투자해야 하는 만큼 막대한 자금이 들어갈 공산이 크다.
박 부회장이 이처럼 여러 복잡한 사정이 얽힌 가운데서도 파운드리 투자 의지를 내비친 데는 SK하이닉스가 미래 성장동력인 파운드리분야에서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SK하이닉스시스템IC 실적 자체는 시스템반도체 호황에 힘입어 나날이 개선되고 있다. 다만 SK하이닉스시스템IC 작년 매출은 7030억 원으로 SK하이닉스 전체 매출의 2%가량에 불과해 아직 주력사업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