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들은 올해 고부가제품에 집중해 실적을 개선하겠다는 전략을 짰는데 국제유가 급락과 낮은 정제마진의 영향으로 1분기부터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다.
▲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왼쪽),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 사장.
4일 정유사들에 따르면 5~6일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OPEC+)’ 정례회의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1월 초만 해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기준으로 배럴당 60달러를 넘었던 국제유가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원유 수요가 줄어들자 40달러 중반대까지 떨어졌다. 3일 서부텍사스산 원유의 장 마감가격은 배럴당 47.18달러였다.
이에 따라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국제유가를 바로잡기 위해 이번 정례회의에서 원유 감산을 논의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정례회의에서 논의될 원유 감산안은 국제유가의 향방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며 “여기서 의미 있는 규모의 감산 합의에 실패해 국제유가 하락세를 되돌릴 수 없다면 정유업계가 떠안을 재고평가손실이 막대해진다”고 말했다.
이미 석유수출국기구의 수장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이 원유 생산량을 하루 100만 배럴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나 글로벌 3위 산유국이자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에서 기타 산유국의 수장 격인 러시아가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앞서 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주요 부처 장관들 및 에너지회사 대표들과 회의를 열고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은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장기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효과적 기구”라며 “이들과 협력해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현재 원유 가격은 러시아 경제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우리는 브렌트유 기준으로 배럴당 42.4달러에 기초해 올해 거시경제정책을 수립했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서부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배럴당 45달러 아래로 떨어진 뒤 진행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부텍사스산 원유의 45달러는 미국 셰일오일 생산회사들의 평균 손익분기점으로 국제유가의 심리적 방어선이다. 이 선이 한 차례 깨진 상황에서 원유 공급과잉이 지속된다면 국제유가 변동폭(밴드)의 다음 하한선은 어느 수준에서 형성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소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석유수출국기구와 기타 산유국들의 모임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원유 생산량을 줄이지 않는 한 유가 하방압력이 제어되기 어려워 보인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통상 브렌트유가 서부텍사스산 원유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푸틴 대통령은 아직 러시아가 원유 감산에 동참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러시아가 감산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정유사들이 바라는 ‘의미 있는 규모’의 감산은 어려워진다.
정유사들은 올해 국제해사기구의 선박연료유 황함량규제(IMO2020)를 기회로 삼아 저유황유(LSFO)와 해양경유(MGO) 등 황함량이 낮은 고부가 정유제품의 생산과 판매에 힘을 실어 부진한 업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 정유사들은 낮은 정제마진 탓에 수익을 제대로 낼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 후세인 알 카타니 에쓰오일 CEO(왼쪽),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글로벌 정유 및 화학시황 분석기관 플래츠(Platts)에 따르면 1~2월 평균 정제마진은 배럴당 1.7달러였다. 정유사들의 일반적 손익분기점인 배럴당 4달러에 크게 못 미쳤다.
국내 정유사들의 원유 도입시차를 고려한 한 달 후행 정제마진은 지난주(2월24일~2월28일) 마이너스 8.1달러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로 감소한 정유제품 수요가 회복되지 않는 한 정제마진은 눈에 띄게 상승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사업 수익성이 악화일로를 걷는 상황에서 재고평가손실까지 겹친다면 1분기 정유사들의 실적 부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이 2020년 1분기에만 각각 4040억 원, 3205억 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했다. 영업손실 가운데 재고 평가손실의 규모가 SK이노베이션은 3550억 원, 에쓰오일은 2800억 원이다.
정유사들은 지난해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지속돼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여전히 실적 부진의 탈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