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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화 제일모직 사장이 30일 서울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제일모직 기업설명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
거버넌스(Governance).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들 사이의 의사결정구조를 뜻한다. 거버넌스는 지배구조라는 말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명확하게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워 거버넌스라는 외래어 표현을 사용할 때가 많다.
삼성그룹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이후 주주보호를 위해 거버넌스 위원회와 CSR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30일 밝혔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해 만들어지는 통합 삼성물산은 앞으로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지주회사의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가치를 올리는 데 주력하겠다고 약속한 셈이다.
윤주화 제일모직 사장은 이날 기업설명회에서 “이사회의 독립운영 강화를 위해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된 거버넌스위원회를 신설할 것”이라며 “특수관계인 거래, 인수합병 등 주주권익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심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사장은 “위원 중 1명을 주주권익 보호담당 위원으로 선임해 이사회와 주주 간 소통을 맡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주주가치를 훼손한다는 부정적 여론에 대한 삼성그룹의 대응인 것이다.
거버넌스위원회 신설이 삼성그룹의 실질적 지주사가 되는 합병 삼성물산을 견제할 수 있을까?
◆ 최고경영자까지 교체하는 거버넌스
거버넌스의 기원은 정치학이다. 거버넌스는 전통적인 정부(거번먼트)에 대응하는 의미로 정부뿐 아니라 민간기업과 시민사회 등이 정치에 참여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거버넌스는 민관협치(民官協治)와 같은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거버넌스는 단순히 국가권력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사회 전반에서 널리 퍼졌다.
특히 기업에서 경영진, 주주, 직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떠오르면서 경영과 관련된 주요 의사결정을 기업 오너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참여하는 지배구조 양상이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거버넌스위원회라는 것은 다소 낯선 개념일 수 있으나 이사회와 사외이사, 감사제도 등이 모두 거버넌스의 일종이다.
외국의 경우 거버넌스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1990년대 이사회가 최고경영자를 교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곳이 GM이다. GM은 1992년 자동차 판매량이 40%나 떨어지고 매일 적자가 5천만 달러씩 늘어날 정도로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다.
그러자 GM 사외이사들은 로버트 스탬플 회장을 전격 경질하고 존 스미스 회장을 영입했다. 스미스 회장은 원가절감 혁신으로 3년 연속 2%의 영업손실률을 기록한 GM에게 영업이익률 3%대 회복을 가져다 줬다.
IBM 이사회도 1993년 존 에이커스 회장 대신 루 거스너 회장으로 회사의 수장을 교체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제임스 로빈슨 회장,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의 폴 레고 회장 등 1993년에만 500대 기업 CEO의 13명이 물러났다.
국내 대기업 가운데 주주보호를 위해 거버넌스위원회를 운영하는 곳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 이사회가 지난해 한전부지를 10조 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받은 뒤 주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올해 3월 주총에서 거버넌스위원회 설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이석채 전 KT 회장이 공기업 성격을 버리고 주주가치 중심으로 KT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지배구조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전 회장이 외압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지배구조 개편을 꾀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KT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그해 한국기업지배구조센터가 주관하는 기업지배구조 평가에서 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황창규 회장 취임 뒤 전 회장과 관련 있는 인사를 대거 물갈이 하는 등 지배구조위원회는 역할을 상실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최근 KB금융지주가 이사회운영위원회와 경영전략위원회 대신 지배구조위원회를 신설했다.
KB금융지주 지배구조위원회는 최근 새로 계열사에 편입된 KB손해보험(옛 LIG손해보험) 사장에 김병현 LIG손해보험 사장을 신임 대표로 추천했다.
◆ 오너 체제에서 거버넌스 실효성 있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한 뒤 거버넌스위원회가 출범해도 오너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우리나라 대기업의 지배구조로 볼 때 오너의 독단적 경영을 견제하고 주주가치를 올리는 데 실효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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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대기업 사외이사의 대부분이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25개 대기업 상장사 108곳에서 열린 이사회 표결을 분석한 결과 사외이사들은 2120개 안건에 대해 고작 6표의 반대표를 던졌다. 비율로 따지면 0.07%에 불과하다. 반면 찬성은 7808표로 95%였다. 불참이나 기권이 4.9%였다.
대기업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반대한 경우 이듬해 교체될 확률이 월등하게 높아진다는 사실도 사외이사가 제 역할을 하기 어렵게 한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사외이사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0~2012년 매출액 상위 100개 비금융기업 이사회에서 한 건이라도 반대한 사외이사는 전부 찬성한 사외이사보다 교체될 확률이 1.95배나 높았다.
제일모직이 신설하기로 한 CSR위원회의 실효성도 미지수다. 제일모직은 거버넌스위원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기로 했으나 CSR위원회는 외부전문가와 사내전문인력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삼성전자가 2013년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CSR위원회를 설치한 데 비하면 다소 소극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2013년 CSR위원회를 구성한 이후 상생협력과 사회복지 등 나눔경영 비용이 2012년 2454억 원에서 5363억 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CSR위원회를 설치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지만 형식적 운영에 그치는 곳도 많다”며 “CSR위원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