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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위기 속 리더십이란 한마디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12월17일 수요 사장단회의 강연자로 윤호일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부소장을 초청했다. 윤 부소장은 남극 킹조지섬 세종과학기지에서 생활하며 생사를 건 극한의 위기상황을 경험하고 극복했다.
윤 부소장은 당시 “위기의 본질은 한 번 조직 속에 들어오면 절대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나가지 않는다”며 “또 위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면 반드시 내게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지금이 위기’라고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이 안팎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삼성물산이 합병반대에 직면해 있고 삼성서울병원의 허술한 메르스 관리는 국가적 재난을 부르고 있다.
계열사 합병과 병원운영이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두 사안이 사회적 이슈화한 데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최악의 위기상황을 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관리의 삼성’으로 불리는 삼성그룹의 위기관리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 ‘관리의 삼성’이 뚫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2일 메르스 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관리의 삼성’의 실패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전해졌다.
전체 확진자 가운데 절반 가량이 삼성서울병원에서 이미 감염됐고 그 숫자가 끝없이 늘어나면서 삼성서울병원은 국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사태 초기만 해도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나 다름없었다. 정부가 병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상 삼성서울병원이 나서 병동봉쇄 등의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삼성서울병원은 메르스 환자를 처음으로 확진한 병원이었다. 송재훈 병원장은 국내 의학계에서 감염 관련 전문의로 명성이 높다. 위기인 것을 알고도 최악의 위기상황을 가정하지 않은 대가는 너무도 크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17일 “병원 하나가 환자관리를 잘못해서 막대한 경제적 손실, 아마 성장률도 다시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위기관리 실패가 일개 병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국가경제 전반에까지 막대한 손실을 낳았다는 지적이다.
◆ 위기관리 컨트롤타워는 작동하고 있나
삼성물산의 합병논란 과정에서도 ‘관리의 삼성’이란 이름이 무색하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이사회를 통해 두 회사의 합병을 전격 선언했다. 사업 시너지 극대화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합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재용 부회장의 ‘부드러운’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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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부회장. |
하지만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라는 변수가 돌출했다. 대주주의 이익을 위한 삼성물산 저평가 논란이 크게 일면서 법적 공방은 물론이고 재벌기업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 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로 번진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 ‘관리의 삼성’이 벌인 일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말도 나돈다. ‘삼성이 하면 다 된다’는 믿음에 너무 매몰돼 위험요인들을 살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은 삼성그룹이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한국 최대 기업집단이, 특권이 오만을 부르고 오만이 무능을 부르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했다.
이건희 회장 부재에 따른 지휘체계 공백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회장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최악의 상황까지도 가정할 리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성물산 저평가 의혹을 제기한 김상조 경제개혁연구소 소장은 엘리엇매니지먼트발 위기상황을 맞은 이유로 삼성그룹이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계획을 발표하기 전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관련 질의를 했는데도 삼성물산이 이를 무시했고 미래전략실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삼성그룹은 조기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적’의 실체를 파악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이런 비슷한 상황이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공세를 취한 뒤에도 또 한 차례 나타났다고 본다.
김 소장은 “관리의 삼성이 이렇게 엉성할 줄은 몰랐다”고 지적한다. 삼성그룹 전체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이 밀실에 갇혀 시장의 요구에도 둔감했고 정보도 부족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번 엘리엇매니지먼트 사태 전개와 관련해 위기관리 측면에서 삼성그룹 내부적으로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실장(부회장)을 비롯한 그룹 주요 경영진과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등 계열사 CEO들은 17일 삼성그룹 수요사장단 회의에서 내부반성을 촉구했다.
이들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사태의 진원지가 돼 버린 데 대해 삼성그룹 차원에서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또 위기 대응시스템에 대한 자성과 혁신의지도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 이재용의 삼성, '소통의 삼성’으로 거듭날까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외에 삼성그룹 전체에서 공식직함을 갖고 있는 것은 최근 취임한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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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순봉 삼성서울병원 사장. |
그런데도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이 그랬듯이 삼성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장악할 것이란 예상에 의문을 다는 이는 많지 않다. ‘이재용 시대의 삼성’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곳곳에서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승계의 정당성을 얻으려면 삼성그룹의 위기상황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부회장이 미래전략실 주도로 물밑에서 진행되는 경영권 승계작업 뒤에 숨어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인 것이다.
당장 삼성서울병원 사태만 해도 올해 국감에서 도마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이사장직을 물려받은 만큼 직간접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이건희 회장은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삼성그룹 전 임직원들을 향해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분기 영업이익이 10조 원을 넘어선 상황이었다.
이 회장은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리의 삼성’은 이런 이 회장 시대의 산물이다.
삼성그룹이 지금 겪고 있는 위기는 이 부회장 시대의 리더십이 ‘관리의 삼성’만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일깨웠다. 삼성그룹이 이제라도 최악의 위기상황을 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통의 삼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