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도시바메모리 지분을 인수한 뒤 반도체공장 투자를 지원하는 등 협력을 적극 추진해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 정부와 미국 웨스턴디지털, SK하이닉스가 모두 도시바메모리에 힘을 실어주며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 독주를 막기 위한 강력한 연합군을 구축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4일 "도시바메모리가 삼성전자와 반도체사업에서 경쟁할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며 "빼앗긴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도했다.
일본 도시바의 반도체 자회사였던 도시바메모리는 1일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 애플과 델 등의 컨소시엄에 인수가 확정되며 반도체사업에서 수많은 우군을 확보하게 됐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도시바메모리의 기존 협력사인 미국 웨스턴디지털은 일본 정부에 도시바메모리의 사업자금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는 요청도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이전부터 도시바의 반도체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도시바메모리는 베인캐피털 측에 인수된 뒤에도 일본 기업들이 절반 이상의 의결권을 확보하도록 해 일본 정부의 지원 명분을 확보했다.
웨스턴디지털 일본법인장은 "일본 정부의 충분한 지원이 없다면 다른 국가의 반도체기업과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며 사실상 한국을 겨냥한 일본의 경쟁심리를 자극하기도 했다.
웨스턴디지털는 도시바메모리와 낸드플래시 기술 개발과 생산 투자, 공장 운영 등에 협력하고 있다. 도시바메모리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시장조사기관 IHS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낸드플래시시장 점유율은 2016년 36%에서 지난해 39%로 뛰었다. 도시바메모리와 웨스턴디지털의 합산 점유율은 같은 기간 35%에서 32%로 떨어졌다.
도시바메모리가 지난해 자금난으로 지분 매각을 추진하며 사업 운영에 차질을 겪는 사이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 수요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점유율을 대거 빼앗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삼성전자의 독주체제는 더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도시바메모리와 웨스턴디지털이 반전 계기를 마련하는 게 시급해지는 이유다.
파이낸셜타임스는 SK하이닉스도 이런 시장 변화에 대응해 도시바메모리와 반도체사업에서 더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고 바라봤다.
도시바메모리 지분 인수 계약조건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도시바메모리의 반도체 기술을 공유하거나 활용할 수 없다. 일본 정부가 일본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바메모리 지분 매각이 처음 추진될 때와 달리 SK하이닉스의 낸드플래시 공정 기술력은 현재 도시바메모리와 웨스턴디지털을 모두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정부와 도시바메모리가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오히려 SK하이닉스에 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도시바메모리가 삼성전자와 경쟁하려면 한국과 국가적 경쟁관계를 극복하고 SK하이닉스와 활발히 협력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우세하다"고 보도했다.
시장조사기관 IHS도 "SK하이닉스와 손을 잡는 것은 현재 도시바메모리의 상황을 놓고 볼 때 중요한 생존 전략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기술 발전에 최근 눈에 띄는 성과를 냈지만 아직 생산시설 규모가 삼성전자를 포함한 경쟁사들과 비교해 크게 뒤처진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도시바메모리가 SK하이닉스와 반도체 기술에서 협력하는 대신 생산시설을 일부 공유하거나 공동으로 투자하는 등의 협력방안을 제시하면 SK하이닉스도 이를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하다.
김선우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가 도시바메모리 지분 인수에 들인 약 4조 원의 투자금 이외에 추가로 사업자금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도시바메모리는 낸드플래시 공장 증설에 모두 38조 원을 들이는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다. 베인캐피털과 웨스턴디지털 외에 최대한 많은 투자 협력사를 찾아 나설 가능성이 유력하다.
나루케 야스오 도시바메모리 사장은 지난해 말 기자회견에서 SK하이닉스의 생산 투자 참여 가능성을 들며 "삼성전자와 경쟁하려면 하나보다 둘이 더 유리하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