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신시장 개척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성공을 못한다 해도 나는 수업료로 생각하겠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은 2012년 미국 제약회사와 특허다툼이 일어나자 직원들을 독려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내 제약바이오회사의 ‘대장’격인 한미약품이 창업 50년 역사 아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임 회장은 한 해 1천억 원에 이르는 연구개발(R&D)비를 쏟아부은 결과 제약업계에서 독보적인 성공신화를 써왔다.
하지만 폐암치료제 신약의 롤러코스터 공시로 시장의 불신을 받아 신약개발에 따른 리스크 차원을 넘어 기업의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
◆ 한미약품 신뢰도에 타격 불가피
정보라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4일 "한미약품의 이번 호재에 뒤따른 악재 공시는 지난해 2분기 기술수출계약에 이은 적자실적 발표로 주가가 폭락한 사태 이후 두번째"라며 "임상실패는 신약개발의 성장통이지만 적절한 전달방법은 아니었으며 한미약품 자체에 대한 신뢰가 문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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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 |
한미약품이 악재에 이어 호재를 잇달아 공시한 데 따른 후폭풍이 거세다.
한미약품은 9월29일 오후 4시40분경 미국 제넨텍에 약 1조 원 규모의 기술수출 내용을 공시했다. 이로부터 약 17시간 뒤인 9월30일 9시30분경 독일 제약사 베링거인겔하임으로부터 8500억 원 규모의 항암제 올무티닙 기술계약 해지통보를 받았다고 공시했다.
한미약품 주가는 호재와 악재가 연거푸 이어지는 공시 때문에 29일부터 롤러코스터를 탔다. 한미약품뿐 아니라 제약바이오회사 주가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한미약품 주가는 4일에도 직전거래일보다 7% 이상 하락해 50만 원 선이 무너졌다. 9월29일 호재성 공시만 보고 다음날 한미약품 주식을 샀을 경우 악재 공시가 나온 뒤 주가급락으로 하루에만 20% 이상 손해를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미약품과 한미사이언스 주가의 급등락으로 이 기간 공매도세력은 두 회사 주식의 공매도거래를 통해 20%가 넘는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법적 절차상의 문제가 없더라도 공시과정이 시장혼란을 부추긴 여파가 워낙 커 한미약품이 도덕성과 신뢰성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한미약품은 지난해에도 호재 공시 이후 곧바로 악재를 공시해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입힌 일이 있다”며 “비슷한 사례가 되풀이되면서 바이오제약주 전반에 불신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한미약품은 지난해 7월에도 베링거인겔하임에 올무티닙 기술수출을 공시한 당일 오후 2분기 어닝쇼크를 공시해 당일 주가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제약바이오회사 주가는 당장 실제 매출에 연결되지 않더라도 기술수출이 신약개발 성공 등 미래가치에 의해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번 한미약품 주가 급등락 사태는 신약개발 리스크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미약품은 24시간 이내 공시를 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장 후 30분이 지나서야 악재를 공시한 점에서 늑장공시 의혹에 휩싸였다.
이관순 한미약품 대표이사는 9월29일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한 긴급 설명회에서 “호재성 공시 직후 악재성 공시를 할 경우 주식시장에 혼란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고 공시 승인과정에서 검토를 거치면서 시간이 지체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증권업계는 오전 7시부터 거래소 승인없이 ‘자율공시’를 할 수 있었던 만큼 개장 전 9시 이전에 해명을 했다면 투자자들의 혼란을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지적한다.
◆ '임성기 성공신화' 에 된서리
임성기 회장은 국내 제약업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중앙대 약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서울 종로에서 ‘임성기약국’을 차렸다.
약국을 내면서 이름을 내건 것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름을 걸고 약국을 찾는 환자들에게 신뢰를 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약국을 운영할 당시 다른 약사들이 꺼려했던 성병 치료제를 취급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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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순 한미약품 대표이사 사장. |
임 회장은 약국에서 번 돈으로 1973년 한미약품공업을 설립해 제약업계에 뛰어들었고 신약개발에 R&D 비용을 아끼지 않은 결과 신약개발과 수출에서 결실을 거뒀다.
1997년 한미약품은 노바티스에 ‘마이크로에멀션’이라는 약물전달 기술을 당시 제약산업 최대 규모인 6300만 달러에 수출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사노피, 얀센, 베링거인겔하임 등 글로벌 제약기업에 8조 원대 규모의 신약 기술수출계약을 체결했다. 한미약품은 2015년 기준 국내 제약회사 중 가장 많은 119건의 특허를 보유했다.
임 회장은 올해 4월 포브스가 발표한 ‘2016년 한국의 50대 부자’ 명단에 7위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창립 43년만인 지난해 제약업계 매출 1위, 매출 1조 원 기록이란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한미약품과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주가가 급등했고 임 회장의 주식평가액도 불어난 덕분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임 회장 등 오너일가 지분가치도 2조 원 넘게 증발한 것으로 추산된다. 임 회장은 한미사이언스를 통해 한미약품을 지배하고 있는데 한미사이언스 지분 34.91%를 보유하고 있다. 한미사이언스는 한미약품 지분 41.37%(431만7104주)를 소유하고 있다.
식약처는 4일 브리핑을 열고 "중앙약사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한미약품의 올리타정에 대해 말기암 환자의 치료를 고려해 의사의 전문적 판단 아래 중증피부 이상반응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환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 제한적으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올리타정은 이번에 문제가 된 폐암 신약 올무티닙의 제품이름이다. 식약처가 제한적 사용허가를 내린 것으로 허가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한 셈이다. 그러나 주가 급등락에 따른 개인투자자들의 반발이 워낙 커 향후 집단소송 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관순 대표는 앞으로도 신약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증권업계는 한미약품이 2차례나 비슷한 사례로 시장불신을 키운 점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대신증권은 한미약품이 단기적으로 주가상승 모멘텀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야 할 난제들로 주가가 횡보할 것이라고 파악하고 목표주가도 기존 100만 원에서 70만 원으로 낮췄다.
HMC투자증권도 한미약품의 기술수출 리스크를 반영해 한미약품 목표주가를 기존 90만 원에서 63만 원으로 대폭 하향했다.
제약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성기 회장의 뚝심있는 도전이 지금의 한미약품을 만들었고 국내 제약업계의 해외진출에 물꼬를 튼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신약개발 리스크와 공시과정에서 모럴헤저드가 부각되면서 기업신뢰성을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