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포스터. |
[비즈니스포스트] 흥미롭게도 요즘 안방과 극장 양쪽에서 전쟁 이야기가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KBS2 TV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제2, 3차 고려거란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32부작으로 기획되었으며 현재 제2차 고려거란전쟁의 막바지 부분까지 방영된 상태이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노량: 죽음의 바다'는 보통 임진왜란이라 통칭하는 전쟁의 마지막 정유재란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대첩’을 그리고 있다.
11세기 초 고려와 16세기 말 조선이라는 시대적 간극이 있지만 이 두 전쟁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동아시아 3국이 참전한 국제전쟁이라는 점과 이 두 전쟁의 결과로 동아시아 지형도에 큰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고려거란전쟁과 임진왜란은 그 시대의 세계대전이라 볼 수 있다.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 제7개 황제 목종의 무능과 부패를 척결한다는 강조의 쿠데타, 강조의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제6대 황제 야율융서의 명분 싸움으로 시작한다.
강조가 옹립한 어린 황제 현종, 제2차 고려거란전쟁의 최고 영웅 양규, 노년에 이른 강감찬 등이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드라마 삼분의 일 지점까지 전개되는 전투장면들은 고려시대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 역대급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에서의 수성전과 귀주에서의 공성전, 죽음을 맞이한 애전 벌판에서의 마지막 전투까지 TV드라마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 전율을 제공했다. 앞으로 방영될 제3차 고려거란전쟁의 하이라이트 ‘귀주대첩’의 시각적 쾌감도 기대가 된다.
3차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의 결과 거란은 국력을 상당히 소진하여 더 이상 송나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였으며, 일정 기간 고려-송-거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거란은 여진에게 흡수되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인 금이 세워진다. 고려는 고려거란전쟁 이후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를 누리게 된다. 고려거란전쟁이 중세의 동아시아 패권 전쟁이라면 임진왜란은 근대를 여는 또 다른 동아시아 패권 전쟁이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 '노량: 죽음의 바다'(2023) 순서로 개봉되었다.
실제 순서는 ‘한산대첩’(1592), ‘명량대첩’(1597), ‘노량대첩’(1598)이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명량대첩’으로 시리즈를 시작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강렬하고 생생한 대사 한 줄에 이 전쟁의 모든 핵심이 농축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1960년대 이래 무수히 많다.
'성웅 이순신'(유현목, 1962), '성웅 이순신'(이규옹, 1971), '난중일기'(장일호, 1977) 등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고, '사명당'(안철현, 1963), '서산대사'(전조명, 1972) 등은 의병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명량' 이전 이순신의 이미지에 관한 최근의 대중적 기억은 KBS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일 것이다.
'명량'은 1970년대 임진왜란 소재의 영화들의 기본적 정서와 플롯 방식을 일부 차용하면서, 현대적으로 해석한 '불멸의 이순신'의 캐릭터도 수용하여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그려냈다.
1970년대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 총화단결의 표상으로 대중서사에 수용되었는데 거기에는 소위 말하는 ‘국뽕’의 정서가 강하게 들어가 있다.
'명량'은 그 정서와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넣는 서사 전략을 사용한다. 갯바위에서 천을 흔드는 백성들, 좌초 위기에 빠진 이순신 배를 끌기 위해 어선을 타고 나온 어부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신파적이지만 대중적인 호소력은 막강해서 170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이라는 배경과 인물에 익숙해진 관객은 신파적 요소가 거의 없는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를 감상할 준비가 되었고 해전의 스펙터클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산: 용의 출현'은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의 선발대와 맞서는 이순신의 활약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원년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반면, '노량: 죽음의 바다'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감한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을 비장하되 담담히 그리고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긴 시간 해전을 보여 준다.
‘고려거란전쟁’이 고려-송-거란이 대립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불러왔다면, ‘임진왜란’은 조선-명-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의 향방에 영향력을 미쳤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가 마무리 되고 후기로 접어든다. 명은 이후 국력이 쇠락하여 청에게 패망하고, 일본은 260여 년이나 지속된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린다.
임진왜란에서 살아서 돌아간 고니시 유키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등은 세키가하라 전투(1600)에서 각각 동군과 서군에 속해 전투를 벌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의 승리로 운명이 갈렸다.
최근 고려거란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연이어 나오고 흥행 성적도 우수하다. 이렇게 동시다발로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나타난 예는 별로 기억에 없다.
21세기 들어와서 세계의 정세가 요동치고 있음이 느껴진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사히 격랑의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빌어본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