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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증권 모습 |
애널리스트들이 궁지로 몰리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이 내놓은 보고서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떨어진다.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내놓는 보고서들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업무환경 등 구조적 요인도 있다. 하지만 안일한 모습으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애널리스트들은 ‘증권사의 꽃’으로 불린다. 애널리스트는 기업분석을 담은 보고서로 진가를 드러내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전문직이다. 이들은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국내외 주식시장 등을 분석하고 예측해 보고서를 낸다. 투자자들은 이 보고서를 참조해 투자전략을 세운다.
애널리스트의 보고서에 대한 신뢰는 곧 애널리스트의 몸값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뢰가 떨어지고 궁지에 몰리면서 애널리스트의 존재감도 미약해지고 있다. 게다가 불황이 겹치면서 증권업계 내부에서 구조조정 1순위가 되고 있다.
◆ 신뢰의 위기에 몰린 애널리스트들
1조 원과 150억 원의 차이.
삼성전자 2분기 잠정실적이 발표된 뒤 국내 주요 증권사들과 외국계 증권사들이내놓은 전망치 차이다. 국내 주요 증권사들이 내놓은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 전망치는 실제보다 1조 원 가량이나 많았다.
반면 외국계 증권사들은 100억~500억 원 가량의 차이를 내며 실제 실적에 근접했다. 이 차이가 곧 신뢰의 차이인 셈이다.
지난달 말 국내 주요 증권사 26곳이 추정한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 전망치는 8조2477억 원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 삼성전자가 발표한 잠정실적은 7조2천억 원이었다.
외국계 증권사들은 실제와 거의 비슷한 전망치를 내놓았다. BNP파리바와 CIMB증권은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을 각각 7조1500억 원과 7조2190억 원으로 전망했다.
국내 증권사들은 2분기 실적 전망 보고서에서 망신을 당한 뒤 그 다음날 삼성전자의 목표가를 일제히 하향조정하는 보고서를 부랴부랴 쏟아냈다.
국내 증권사들이 이런 망신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1월7일은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들이 지우고 싶은 날 중 하나로 기억된다. 당시 국내 증권사들의 삼성전자 4분기 실적 전망치는 실제보다 1조 원 이상 벗어났다.
반면 외국계 증권사는 그때도 실제 실적에 근사한 전망치를 내놓았다. 국내 대다수 증권사는 스마트폰 부진에 따른 실적악화를 고려해도 막판까지 9조 원을 웃돌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바꾸지 않다가 큰 망신을 당했다.
국내 증권사의 정확도가 거의 꼴찌 수준이라는 점은 다른 조사에서도 입증된다.
지난 2월 신한금융투자와 캐나다 금융정보업체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1월 말 기준 주요 45국의 기업이익 추정치 정확도를 분석한 결과 한국은 전체 36위에 그쳤다.
정확도가 가장 높은 곳은 일본이었고 중국, 아르헨티나, 러시아가 뒤를 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보다 아래에 있는 나라 중 4개 국가는 심각한 재정위기와 국가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포르투갈, 그리스였기 때문에 한국은 41개 국가 가운데 거의 꼴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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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권업계 불황에 애널리스트들도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다. |
◆ 애널리스트들은 왜 신뢰를 잃었나
“장밋빛 전망을 팔아라.”
낙관적 전망에 매수의견 일색인 국내 증권사들의 보고서를 놓고 자조처럼 하는 말이다. 대기업과 투자자의 눈치를 봐야 해 매도의견을 쉽게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매도의견을 냈다가 해당기업에서 보복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회사 내 회사채를 담당하는 부서가 곧바로 항의하고 개인투자자들도 원성이 빗발친다”며 “매도의견을 내면 업계에서 거의 매장되는 분위기에서 도저히 매도의견을 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매도의견을 낸 애널리스트에게는 정보를 주지 않거나 기업탐방을 오지 못하게 하는 등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기업탐방을 하지 못할 경우 애널리스트는 사무실에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매도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널리스트들은 매도라는 말을 거의 입에 담지 않는 분위기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애널리스트의 말 중 투자의견은 매수를 유지하되 목표주가를 낮추라는 말은 사실상 매도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들이 매도의견을 낼 것 같은 종목은 아예 분석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업계의 한 애널리스트는 매도의견을 냈다가 투자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치는 바람에 몇 시간 넘게 전화기를 꺼놓았던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최근 출혈경쟁으로 증권사들이 분석 보고서를 무료로 공개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투자 보고서를 볼 수 있게 되면서 항의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눈치를 봐야 할 곳도 늘었다.
금융정보제공업체 에프앤가이드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 증권사의 보고서 중 매도의견을 낸 것은 전체 12~13만 건 중 5건이 채 되지 않는다.
애널리스트들이 내는 보고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요인으로 기업이 제공하는 재무제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꼽힌다.
외국계 증권사들은 보고서를 작성할 때 해외재고 상태나 하청업체들까지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JP모건은 작년 보고서를 작성하며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해외공장들의 주문량을 분석하기도 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애널리스트들이 기업을 분석할 때 재무제표를 하나씩 뜯어 재구조화하는 것이 기업 분석의 정석”이라며 “하지만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단순히 기업설명회(IR)에서 나오는 자료만 그대로 받아 써 객관적 잣대로 기업분석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애널리스트는 ‘증권가의 꽃’이라는 화려한 별명과 달리 펀드매니저와 기관투자자 앞에서 ‘을’이다. 펀드매니저는 주식 매매주문을 내기 때문에 어느 증권사에 주문을 내느냐에 따라 증권사의 수수료 수입이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애널리스트의 가장 중요 임무 중 하나는 보고서를 통해 펀드매니저의 관심을 끄는 일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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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DB대우증권은 2012년 주요 기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IR행사 'KDB 대우 코리아 컨퍼런스 2012(KDB DAEWOO Korea Conference 2012)'를 개최했다. |
◆ 스스로 신뢰 져버리는 애널리스트
지난 3월 통신사 주파수 등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루던 한 전문 블로거가 IT커뮤니티 사이트에 “S증권사가 내 블로그의 글을 그대로 베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문제가 된 보고서는 지난해 6월 S증권의 어느 애널리스트가 내놓은 통신서비스 관련 보고서다.
보고서가 문제가 되자 이 애널리스트는 표절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는 “당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블로그의 글을 참고했으며 보고서에 내용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은 인정한다”며 “당시 해당 블로거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으며 최근 이메일 주소를 알게 돼 양해의 뜻을 전하려던 참”이라고 해명했다.
더구나 이 연구원은 애널리스트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중견 애널리스트로 알려져 더 큰 충격을 줬다. 2010년 업계 최연소 리서치센터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동안 애널리스트들의 표절이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나 크게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특정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블로그를 통해 분석글을 올리면 일부 애널리스트들이 해당 글을 참고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말했다.
표절문제는 국경도 넘어선다. 일부 애널리스트의 경우 해외 사이트나 관련업계 유명 전문가의 글을 일부 도용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생존경쟁에 몰린 애널리스트들
신뢰의 위기는 생존의 문제로 이어졌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애널리스트들은 증권업계에서 구조조정 1순위로 떠올랐다. 특히 영업처럼 수익을 내는 부서가 아니라 고액연봉으로 비용만 축내는 부서로 취급받으며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지난 1년 동안 교체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들만 해도 10여 명에 이른다. 지난해 상반기 유진투자증권, KTB투자증권, LIG투자증권의 리서치센터장이 물러났고 하반기에도 교체가 줄을 이었다.
김철범 KB투자증권 전무와 오성진 현대증권 상무는 각각 지난해 7월과 12월 리서치센터를 떠났다. 그 자리는 내부 애널리스트였던 허문욱 상무와 이상화 이사가 이어받았다. 교보증권도 송상훈 센터장이 물러나고 김영준 애널리스트가 센터장으로 올라섰다.
새로 부임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들은 대부분 1960년대 중후반 출생으로 업계 경력이 20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1970년대 생을 파격적으로 센터장에 앉히곤 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 베테랑 중심으로 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센터장 아래의 애널리스트들 역시 자리를 보전받지 못한다. 애널리스트들은 ‘전문 계약직’으로 고용보장에서는 철저한 ‘을’의 위치다.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5월 증권사 애널리스트 수는 1276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2011년 2월 말 1580명보다 19.2% 줄었다. 애널리스트는 그동안 꾸준히 줄어 2012년 말 1455명, 지난해 말 1322명에 이어지다 올해 1200명 선까지 떨어졌다.
한 중견 애널리스트는 “한때 고액연봉자라고 해서 애널리스트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더 불안정한 직업”이라며 “따지고 보면 계약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연봉도 줄었다.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인 애널리스트들의 연봉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2010년 전까지 5~8년차에 연봉 2억~3억 원을 받는 애널리스트가 많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호황기에 비해 최근 평균연봉은 30% 이상 삭감됐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의 생존경쟁은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증권가 보고서는 8만5천 건대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자연스럽게 업무환경도 더 열악해졌다. 하루 평균 10~12시간 근무는 기본이며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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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이 서울 중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린 삼성전자 애널리스트 데이에서 중장기전략에 대해서 발표하고 있다.<사진=삼성전자 제공> |
◆ 애널리스트는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지난 1일 한 증권사의 유명 애널리스트는 SNS에 ‘나 역시 잠재적 범죄자다’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그는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이 예측능력과 도덕성을 놓고 도마 위에 오른 데 이어 회사에서 비용부서라는 낙인까지 찍혔다”며 “모두가 하고 싶어 하는 직업이 되길 바랐는데 오히려 반대로만 가고 있으니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는 “더 깨끗하고 좋아지려고 시련이 오는 것 아니겠느냐”고 푸념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독립리서치센터가 생기는 등 애널리스트들의 자정노력도 눈에 띄고 있다. 독립리서치센터는 기존의 리서치센터와 달리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리서치 제공을 목적으로 설립된 전문회사다.
지난 1월 리서치센터장 출신들이 주축이 돼 설립한 독립리서치센터 ‘올라에프앤(OlaFN)’은 “고객의 자산관리와 투자자 보호를 위해 애널리스트들의 소신있는 판단이 매우 중요하다”며 “매도의견을 간헐적으로 내고 있다”고 밝혔다.
변준호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도 “애널리스트는 기본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산업과 기업에 대한 소신있는 의견이 곧 리서치의 생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감히 매도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리서치센터로 거듭나겠다”고 덧붙였다.
증권사 보고서에 ‘이 자료는 당사가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으며 투자자 자신의 판단과 책임 하에 최종 결정하라’는 문구가 항상 따라다닌다. 최종적 책임은 투자자 몫이란 얘기다. 그러나 애널리스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정확한 예측과 분석력인 만큼 더욱 정확한 분석을 위해 분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애널리스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증권업 자체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 증권사의 장밋빛 전망에 이은 어닝쇼크가 만성화되면서 부작용은 점점 커지고 있다. 가장 기본인 실적 전망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투자심리까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과대추정이 어닝쇼크를 부르고 이 때문에 다시 전망치를 하향하면서 증시 전체의 부진을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이 국내 증시로 쉽게 귀환하지 못하는 데도 이런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