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동강이 만든 복된 땅들이 많다. 사진은 대구 성서5차산업단지 위성사진. <네이버 지도> |
[비즈니스포스트] 낙동강은 상주를 지나 계속 남하하며 위천, 감천, 한천 등과 합류하여 몸집이 커집니다. 그리고, 금오산 아래 금오벌을 은은히 감싸고 흐릅니다.
금오벌에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금오산 자락의 수려한 산봉우리들과 낙동강 물굽이가 어우러져 아주 큰 재복의 기운이 있습니다. 구미 국가산단은 여기에 자리 잡아 그 동안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구미를 지난 낙동강이 다시 한 번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와 상곡리, 호촌리, 평리리 일대입니다. 낙동강에 둘러싸인 유역 면적이 7제곱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이는 구미 국가 산단 1단지 면적과 비슷힙니다. 곽촌리에서는 멀리 낙동정맥에서 발원한 금호강이 합류하여 낙동강의 기상이 더욱 장해집니다.
이곳의 주산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게 생겼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었습니다. 주산의 주맥 아래엔 연꽃처럼 생긴 봉우리들도 여러 개 있습니다. 연꽃이 강가에 피어난 형상이니 여기도 연화부수형의 명당입니다. 또, 낙동강 건너 앞쪽에는 크고 작은 노적봉들이 여럿 보입니다.
낙동강이 꼭 끌어안듯 감싸주고 연화부수형에다 노적봉이 곳곳에 솟았으니 매우 큰 재복을 불러올 기운이 서린 명당 복지입니다. 주산의 산세는 구미산단 1단지에 미치지 못하나 낙동강의 수세는 훨씬 더 강하고 좋습니다. 언젠가 이 기운이 쓰이게 되면, 구미산단 못지않게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 봅니다.
이곳 다산면 맞은 편에는 대구의 성서산단이 있습니다. 성서산단은 5차에 걸쳐 조성됐는데 1단지는 1965년에 조성되기 시작했고, 5단지는 2012년에 완공됐습니다. 이에 더해 따로 출판단지도 조성됐습니다.
현재 성서산단에는 3112개 업체가 입주해 있습니다. 여기서 근무하는 직원 수는 4만8463명입니다. 매우 큰 규모입니다. 일반 산업단지이지만, 업체 수와 직원 수로 보면 국가산단에 버금갑니다. 그 규모만큼 대구와 국가 경제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습니다.
성서산단의 여섯 단지 중 복덕의 기운이 가장 좋은 터에 자리 잡은 단지는 5차 단지입니다. 5단지는 다른 단지들과는 좀 떨어져 금호강변에 자리 잡았습니다. 금호강이 휘감아 주는 곳이라 재복이 크게 들어오니 참 이상적인 산단 터입니다. 이곳은 첨단 산업을 위해 조성된 단지입니다.
5단지는 단지 조성이 2012년도에 끝났습니다. 기업들이 여기에 입주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을 한 기간은 10년 정도 될 것입니다. 이제 머지 않아 이곳에 서린 복덕의 기운이 활짝 피어납니다.
그 기운으로 여기 입주한 기업들의 사업이 크게 번창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5단지 터는 앞서 언급한 다산면 일대보다 훨씬 좁습니다. 면적이 4분의 일 정도 됩니다. 강물의 수세 또한 훨씬 약합니다. 이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다산면을 지난 낙동강은 10킬로쯤 남하하여 다시 또 크게 휘어져 흐르며 빼어난 복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은 고령군 개진면 인안리와 생리, 부리, 옥산리 일대입니다.
이곳은 전형적인 연화부수형의 명당입니다. 이곳 주산에는 수많은 연꽃 형상의 봉우리들이 빽빽이 모여 있습니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밀집해 있는 그 모습은 흡사 연꽃이 가득한 연못처럼 보입니다. 모든 봉우리가 단아하고 수려하며 생기가 넘칩니다. 연화부수형에다 낙동강 품 안에 안겨 있으니 큰 재복의 기운이 감도는 곳입니다.
낙동강 건너편 바로 앞쪽에는 비슬산에서 뻗어온 산줄기 끝자락에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솟아 있습니다. 이 봉우리들이 안산인데 형상이 단정하여 맑은 기운을 보태줍니다. 안산들 뒤로는 멀리 비슬산이 웅장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터를 보호하는 수호신 같습니다.
이곳의 청룡과 백호도 비슬산에서 뻗어온 산줄기입니다.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청룡이 되고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는 백호입니다. 청룡, 백호, 안산 모두 높이도 적당하고 모습도 흉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 없이 단정하고 수려합니다.
모두 명당의 복된 기운을 함께 북돋워줍니다. 또 사방 어디에도 공허하게 비워진 곳이 없어 명당의 생기가 흩어져 달아나지 않고 잘 모이며, 흉한 기운이 침범하기도 어렵습니다.
이곳은 면적이 다산면 호촌리 일대보다는 많이 좁습니다. 평지의 넓이가 삼분의 일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 서린 복된 기운은 호촌리 일대 못지 않게 큽니다. 이곳 주산의 기상과 생기가 매우 생동하고 장하기 때문입니다.
낙동강 건너편에는 달성군 논공읍과 현풍읍이 있습니다. 논공읍에는 달성 1차 산업단지가 자리 잡았습니다. 낙동강 가까이에는 논공 시가지가 있고, 그 뒤로 산골짜기에 산단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단지 중에는 달성산단처럼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곳도 많고, 물과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조성된 곳도 많습니다. 좋은 물이 있는 곳에 재복의 기운이 왕성한데 그런 곳을 잘 쓰지 않는 게 안타깝습니다.
개진면 옥산리 하류에도 낙동강이 크게 휘어 돌아 만든 물돌이 마을이 세 곳 더 있습니다. 그곳은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와, 의령군 낙서면 여의리 정곡리,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입니다.
세 곳 모두 다산면 개진면보다 면적은 훨씬 작지만, 여기서 사는 이들이 평안히 복을 누리며 살아갈 복덕의 기운이 큰 곳입니다. 여기에 서려 있는 좋은 정기가 활짝 피어나면 큰 재복도 누리게 됩니다. 남지읍 월하리 하류에는 낙동강이 180도 이상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이 없습니다.
낙동강 본류 뿐 아니라, 지류들도 곳곳에 명당 복지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곳들이 반변천의 내앞마을, 내성천의 무섬마을과 닭실마을입니다. 내앞마을과 닭실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의 4대 명당이라는 명성을 얻은 곳입니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이 300도 가까이 아주 크게 휘감아준 물돌이 마을입니다. 냇물을 건너지 않고는 마을로 갈 수 없어 섬과 같은 곳이라 하여 원래는 물섬이라 불리웠고 후에 ㄹ받침이 없어져 무섬이 되었습니다. 무섬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냇물로 명성이 자자한 내성천에서도 풍광이 매우 빼어난 경승지입니다.
이 외지고 아름다운 곳에 처음 터를 잡고 산 이는 반남 박씨 박수 선생이입니다. 선생은 1666년 무섬마을에 입향했는데 선생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습니다. 선생의 증손녀는 선성 김씨 문중의 김대 선생에게 출가했는데 김대 선생과 그 자손들도 반남 박씨와 공존하며 대를 이어 살았습니다.
무섬마을 터는 연화부수형의 명당입니다. 마을의 주산인 뒷산은 연꽃 형상이고, 집들이 모여 있는 평지는 연잎 형상입니다. 사방의 산수가 그림처럼 아름답고 깨끗하니 참으로 귀한 복지입니다.
그러기에 두 가문이 400년 가까이 복을 누리며 대를 이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에는 변변한 농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성천 건너 바깥 마을 곳곳의 토지를 소유하여 모두 유복하게 지냈습니다.
무섬마을 사람들은 의로운 기개 또한 드높아 일제 때는 마을에 아도서숙이란 학교를 세워 민족의식과 애국정신을 크게 선양했습니다. 마을 사람 다섯 분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습니다. 이 다섯 분 외에도 마을 사람 전체가 독립을 갈망하며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닭실마을은 내성천의 두 지류인 가계천과 동막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닭실마을 터는 금계포란형,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입니다. 뒤의 주산에 닭 형상의 봉우리와 알처럼 생긴 봉우리들이 함께 있습니다.
마을 앞쪽 가계천 건너에도 닭 형상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은 암탉과 알을 지키는 수탉입니다. 가계천과 동막천은 내성천보다 작은 하천이지만, 맑은 물이 끊임 없이 흘러 많은 재복을 불러옵니다. 또, 주산을 비롯한 사방의 산들이 생기가 넘치고 수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할 곳입니다.
닭실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인데 입향조는 조선 중엽의 권벌 선생으로 1520년에 여기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 후 닭실마을 출신 16명이 과거에 급제했고, 국난이 있을 때 의병장 세 분이 나왔습니다.
마지막 의병장은 민비 시해 후 경상도 북부지역 의병을 이끌었던 권세연 선생입니다. 선생의 맏손자 권병섭 선생은 파리장서사건에 연루되었고, 둘째 손자 권경섭 선생은 신간회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여기 사는 이들이 복덕을 누리며 평안히 살았고, 나라의 인재와 충의지사를 함께 배출했으니 참 이상적인 복지입니다.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김만근 선생인데 14세기 말엽에 여기 들어와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선생의 자손들이 6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살아왔습니다. 이곳이 특별한 복지라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선생은 여기가 완사명월형, 깨끗한 비단에 비친 밝은 달의 형국이라 했습니다. 마을의 주산은 달덩이처럼 둥글고, 마을 앞에 흐르는 반변천은 비단을 펼쳐놓은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변천은 지류이지만 큰 냇물이라 많은 불러오는 기운이 있습니다. 또, 사방의 산세는 닭실마을처럼 매우 수려하며 생동감이 넘칩니다. 내앞마을 터는 큰 부호와 훌륭한 인재들과 충의지사가 연이어 나올 명당 복지입니다.
이곳 의성 김씨 가문은 대대로 부유하고 유복하게 살았고, 조선시대엔 과거급제자를 24명이나 배출했습니다. 또, 일제 침략기엔 온 문중이 일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널리 알려진 애국지사로는 구한말 경상도 북부지역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흥락 선생, 만주에서 이상룡 선생과 함께 일제와 싸운 김동삼 선생 김대락 선생, 그리고 김흥락 선생의 손자로 천석군 재산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김용환 선생 등이 있습니다.
문중 사람 18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니 유례없는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경상북도 독립기념관이 바로 여기 내앞마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복지 중의 복지라 할 수 있습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