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도 전기도 끊긴 상태의 ‘황궁’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첫 번째로 마주한 문제는 아파트로 들어온 외부인들을 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
[비즈니스포스트]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란 무엇일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시즌 마지막은 쌍문동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이웃들이 새로 개발되는 개포동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걸로 마무리 된다. 서민의 꿈이 아파트였던 1980년대에 걸맞은 해피엔딩이었다.
아파트는 성장과 발전의 상징이자 투기와 부의 불균형이라는 그늘을 동시에 안고 있다. 아파트 값을 위해 매매가를 담합하고 인근 주민들의 통행을 차단한다는 등의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다.
현재 흥행 1위 성적을 내고 있는 SF 재난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엄태화 감독)는 대한민국의 모든 아파트가 무너지고 딱 한 동만 남아 있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그 점은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 홈’과 유사한데 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흉측하고 무서운 괴물들이 출몰한 스위트 홈보다 오직 인간들만 나오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훨씬 더 잔혹하게 느껴진다.
물도 전기도 끊긴 상태의 ‘황궁’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첫 번째로 마주한 문제는 아파트로 들어온 외부인들을 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공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철저히 입주민 위주로 분배해야 한다는 논리다. 입주민 대표를 뽑고 방범대를 조직하면서 이들이 내 건 구호 1번이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다.
대한민국 아파트의 역사는 원주민을 내몰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를 내쫓고 차지한 공간, 아파트에 은밀하게 내재된 업보가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가장 대조적인 두 사람은 영탁(이병헌)과 명화(박보영)이다.
누군가에게 내몰려서 자신도 누군가를 내쫓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힌 인물 영탁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캐릭터가 급변한다. 순수하고 희생적으로 보였던 등장에서 마치 게릴라전을 지휘하는 강인한 지도자 같은 모습으로의 변모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간호사인 명화는 시종일관 흔들림도 변화도 없는 인간의 선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 명은 급변하고 한 명은 고정되어 있지만, 둘은 인간 스펙트럼의 양 극단을 상징하는 클리세 유형이다. 이 둘 사이에 놓인 대부분의 인물들은 사안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우왕좌왕 한다.
아파트는 부의 지표이자 척도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 외부인으로 콕 집어 언급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인근 ‘드림팰리스’ 주민들로 평소 황궁 아파트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근거는 당연히 집값의 차이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상황이 역전되어 드림팰리스만 남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을 발도 못 붙이게 했을 거라며 적의를 드러낸다.
무정부 상태가 된 황궁 아파트에서는 돈도 지위도 다 무화된다. 그 와중에도 물건을 파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가 소지한 007 가방에는 ‘현금 사절’이 크게 적혀있다. 돈이 세상사의 척도이던 일상이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다.
▲ 아파트를 소재로 한 독립영화 ‘드림팰리스’(가성문 감독)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지독히 현실적인 영화다. SF 블록버스터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지만 두 작품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인다. 위에 설명한 대사에서도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김선영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있다. |
아파트를 소재로 한 독립영화 ‘드림팰리스’(가성문 감독)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지독히 현실적인 영화다.
SF 블록버스터 콘크리트 유토피아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지만 두 작품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인다. 위에 설명한 대사에서도 우연한 공통점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김선영 배우가 주인공을 맡고 있다.
드림팰리스는 산업재해 사건과 신축 아파트 입주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며 전개된다. 산업재해로 남편을 잃은 혜정(김선영)은 보상금으로 구입한 아파트로 고3 아들을 데리고 이사한다.
미분양이 더 많은 수도권 신축 아파트는 드림팰리스라는 이름과 달리 하자가 많았다. 싱크대, 세면대, 욕조 등 집안 곳곳의 수도에서는 녹물이 몇날 며칠이고 흘러나오는데 보수 공사는 지연되고 있다.
드림팰리스는 곤혹스런 딜레마에 빠진 인간들을 잘 묘사하는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세일즈맨’(2017), ‘누구나 아는 비밀’(2019), ‘어떤 영웅’(2022)에 이르기까지 아쉬가르 파라디의 영화는 현상 이면에 숨겨진 진실, 선의의 왜곡된 대가,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이기심 등을 다루고 있다.
드림팰리스는 산업재해라는 하나의 사건에도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유가족의 처지나 아파트 입주를 둘러싼 주민들의 갈등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진의와 선의는 무엇일까 의심하고 회의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영화다.
내게 아파트라는 단어는 영화로부터 왔다. 어린 시절 TV로 본 주말의 명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빌리 와일더, 1960)가 그것이다.
주택에 살고 있던 나는 그때까지 아파트에 가 본 적이 없었고 영화에 나오는 아파트라는 장소가 뭔가 근사하고 은밀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재, 아파트를 소재로 한 완전 다른 스타일의 영화 두 편을 본 감상은 아파트가 무섭다는 것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아파트에는 ‘피, 땀, 눈물’이 켜켜이 쌓였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