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선거는 인물보다 구도다." 정치판에서 정설로 여겨지는 말이다. 선거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굳어지면 좋은 인물이 나선다 해도 좀처럼 이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2020년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의 압승을 거둔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할 여당에 힘을 몰아줘야 한다는 구도가 굳어진 점이 당시 야당 참패의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됐다.
▲ 현대차가 중국 시장에서 후퇴를 거듭하면서 실적 회복을 위한 전략을 최근 내놨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중국 판매를 회복하기 쉽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사진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글로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사업을 둘러싼 정치적 구도가 굳어지면 힘을 쓰지 못하는 일이 흔하게 나타난다. 어떤 나라와 관계가 틀어지면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도 현지 시장에서 지리멸렬하는 사례가 많다.
현대자동차그룹이 2017년 맞닥뜨렸던 중국 정부의 한한령(한국상품 제한)도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중국은 한국 내 고고도미사일 배치에 안보 위협을 내세우며 한한령으로 반발했고 그 뒤 현대차그룹은 중국 시장에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대차그룹은 2016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순탄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현대차와 기아는 그해 중국에서 합산 179만2천 대를 팔며 현지에서 6.4%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한한령에 따른 한국 제품을 향한 직간접적 규제장벽에 현대차그룹의 중국 시장에서 판매량은 지속해서 줄어 들었다. 중국은 이른바 '애국소비' 경향이 뚜렷해 정부 당국의 정책 기조에 소비자들이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도 판매 감소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현대차그룹의 2022년 중국 판매량은 전년보다 34.3%나 감소한 35만4천 대에 머물렀다. 현지 시장점유율은 1.3%까지 하락했다. 이런 부진에 현대차와 기아의 중국법인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 되고 말았다.
현대차는 중국 고급차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미국에서 잘 팔리는 제네시스를 2021년 4월 중국에 선보였다. 하지만 올해까지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현대차에선 지난 6월20일 '2023 CEO 인베스터데이' 행사를 통해 중국 공장 4곳 가운데 2개 공장에만 집중해 생산 효율성을 높인다는 계획을 내놨다. 가동을 멈추게 된 공장 2곳은 매각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중국 내 판매 라인업을 13종에서 8차종으로 줄이기로 했다. 아울러 제네시스, 팰리세이드 등 고급차 및 SUV 위주로 현지 라인업을 꾸리고 고성능 N 브랜드를 내세운다는 고급화 전략을 세웠다. 판매 확대보다는 수익성 개선에 방점을 찍은 셈이다.
기아에선 다양한 차급의 신차를 출시해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에서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올해 EV6와 EV5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6종의 전기차 라인업을 내세워 세계 최대 중국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이 중국에서 오랜 부진을 겪은 만큼 단기간에 반등을 이뤄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이 6월20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개최한 '2023 CEO 인베스터데이'에서 사업 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
사실 현대차그룹이 차를 못 만들면 억울하지나 않다. 지난 몇 년간 전기차를 중심으로 세계 주요 자동차 시상식을 휩쓸다시피 했다. 품질과 디자인에서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이에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합산 자동차 판매량이 글로벌 3위에 오를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유독 중국에서만큼은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 놓여 있다.
한국이 중국과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하지 못한다면 현대차그룹이 예전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는 게 현재로선 합리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주한 중국 대사가 미국에 치우진 한국의 외교 행보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고 두 나라 외교 부처 사이에는 날 선 공방이 오갔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서 주한 중국 대사를 비판한 것으로 전해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으로서는 이런 한중 관계가 답답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 주요국뿐 아니라 그렇게나 중국을 견제하던 미국까지도 경색됐던 외교 관계를 풀기 위해 장관급 인사들이 줄줄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진다.
이에 우리 정부도 미국과 가치동맹에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중국과 외교 관계를 원만히 풀기 위한 해법을 모색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한국과 중국 관계가 경색되는 사이 우리나라의 상반기 대중국 수출은 57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6.7%나 줄었다.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19.7%로 처음 20% 선이 무너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글로벌 경제에서 지정학적 위험이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럴수록 외교는 기업들의 글로벌 사업 성패를 좌우할 구도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현대차와 기아는 2분기까지 3개 분기 연속으로 최대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추산된다. 외교까지 밀어준다면 현대차그룹이 드넓은 중국 시장에서 질주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