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은 미국과 탄소 무역장벽을 놓고 갈등을 벌이면서 한국과 공조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유럽연합 통상담당 수석부집행위원장은 2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 "우리는 공정함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과 접촉에 한마음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사진은 두 사람의 기념촬영 모습. <돔브로브스키스 트위터>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에 관한 유럽연합(EU)의 반발이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은 물론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탄소 무역장벽에 대응해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서방 사이 무역 갈등과 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15일(현지시각)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을 놓고 “공정한 경쟁을 유지하기 위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역시 14일 유럽연합 정상회의를 앞두고 “유럽도 미국에 유럽식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으로 대응해야 한다”며 발언에 날을 세웠다. 유럽연합 내 주요 인사들은 미국을 향한 거센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미 새로운 관세인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을 추진하며 탄소 무역장벽을 쌓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을 마련하자 유럽은 이를 구실로 유럽판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이라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 Critical Raw Material Act)’까지 더해 탄소장벽을 높이려 하고 있다.
핵심원자재법은 아직 구체적으로 내용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유럽산 광물의 생산, 소비 활성화를 위해 중국 등 지역의 광물이 사용된 전기차 배터리와 같은 공산품을 대상으로 보조금 차별 등 조치가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변화 대응을 명분으로 시작된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 신경전이 당장은 무역장벽을 높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미국과 유럽 사이 경쟁으로 만들어지는 탄소 무역장벽은 서방 외 지역에서는 더욱 넘기 힘든 장벽이 될 공산이 크다.
탄소 무역장벽을 넘을 만한 친환경 기술에는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돼 서방이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서방 현지에 공장을 짓고 원재료를 조달하는 등 서방 외 지역 국가에게 부담이 큰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14일 “유럽의 청정기술을 기반으로 산업 근간을 강화해야 한다”며 “일부 청정분야 투자에서 보조금을 통해 제3국의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지 않고 유럽연합에 계속 투자하면서 유럽에 남도록 하는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러시아, 중국 등에서 적극적으로 서방의 주도권에 도전하는 움직임도 활발해지는 만큼 미국과 유럽이 무역에서 갈등 수위를 마냥 높이기도 어려워 보인다.
로베르타 메촐라 유럽연합 의회 의장은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분명한 한 가지는 지금 우리가 동맹들과 무역전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유럽이 강하게 반발하자 다소 물러서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1일 미국을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조정과 변화가 필요한 결함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이 탄소 무역장벽 관련해 규제 강도 조정 등 수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한국에는 기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품목에서 한국이 지닌 산업 경쟁력은 물론 중국, 러시아에 인접해 있는 한국의 지리적, 전략적 특성이 미국과 유럽 양측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연합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에 대응하며 한국과 적극적으로 공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유럽연합 통상담당 수석부집행위원장은 2일 벨기에를 방문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난 뒤 "우리는 공정함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과 접촉에 한마음(like-minded)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각국 사이 자유무역협정(FTA) 등 각종 무역 관련 규범을 고려하면 미국과 유럽이 무역장벽의 강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한국만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어렵다.
안 본부장도 7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미국과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문제 등을 협상하면서 한국에 대한 대우가 유럽연합보다 불리하게 하는 부분이 없도록 하겠다는 확인을 받고 있다”며 “유럽연합과 비교해 한국이 차별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