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국민연금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국민연금은 올해 3월 국내 기업들의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서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의 대기업 계열사를 대상으로 531건의 안건에서 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가운데 반대 의견을 낸 의결권 행사는 78건으로 전제 의결권 행사 건수 가운데 14.7% 정도다.
그나마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대상 안건도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이 34건, 사내이사 선임 안건 18건, 사외이사 선인 안건 9건, 감사위원 선임 안건 8건, 정관 일부 변경 6건, 임원 퇴직금 지급규정 변경 안건 3건 등으로 대부분 이사 보수나 선임 관련 안건에 국한됐다.
무엇보다 아픈 대목은 국민연금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 가운데 부결로 결론이 난 안건은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이다.
올해 주총 시즌을 앞두고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재계 단체들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비판하며 볼멘소리를 내던 것을 고려하면 비교적 싱겁게 결론이 난 셈이다.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는 말까지 시장에서 나왔다.
전경련은 지난 2월27일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기업들이 국민연금에 느끼는 부담을 조사한 여론결과를 내놓으며 국민연금을 향해 날을 세웠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연금이 반대한 안건의 주주총회 통과 전망’에는 기업들의 68.8%가 부정적으로 본다고 답했다. ‘가장 부담을 느끼는 주주제안 주체’를 묻는 질문에는 가장 많은 24.7%의 기업들이 국민연급을 꼽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이번에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통한 수탁자 책임 활동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대규모 자금 운용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다른 기관투자자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많은 양의 국내 주요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투자주체이다. 그럼에도 주총에서 단 한 건도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주의 가장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권리인 의결권 행사에서 기업의 경영활동에 영향을 주는 데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주주제안 등 다른 주주권 행사 방식에서는 실효성을 기대하기 더욱 어렵다.
재계가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 운영방안을 개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점도 김 이사장에게 부담이다.
기금위는 국민연금의 기금운용과 함께 의결권 등 주주권 행사 관련 의사를 결정하는 기구이다. 수탁위는 기금위에서 다루기 어려운 일부 안건의 의사결정을 위해 임시로 소집되는 기구다.
재계는 꾸준히 국민연금공단에서 기금위의 독립성을 높여야 한다며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 별도 공사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은 지난 3월29일에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축소 주장이 담긴 정책건의집을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정책건의집에는 “기금위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기금위원을 전원 민간의 투자, 금융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거나 “수탁위는 노동, 시민단체 추천 인사로 편중돼 있어 주주대표소송 결정권한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새로 들어설 정부의 정책방향이 기업친화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김 이사장에게는 반갑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한덕수 국무총리 지명자 등 다음 정부의 주요인사들은 이미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태도를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윤 당선자는 지난 3월21일 경제6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서 “기업이 더 자유롭게 판단하고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방해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며 “방해 요소가 어떤 것인지 많이 느끼고 아실 테니까 앞으로 조언해 달라”고 말했다.
한 국무총리 지명자 역시 5일 최저임금제를 두고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가면 기업이 오히려 고용을 줄이는 결과가 와서 서로 ‘루즈(Lose)-루즈 게임’이 된다”며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노사 간의 협의에서 결정할 일을 정부가 개입해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은 굉장히 신중하고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