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신천역 4번 출구 앞이야. 눈 떠보니 너네 집 횡단보도 앞이야. 네가 있던 곳 우리가 있던 곳.”

가수 ‘포맨(4MEN)’이 2013년 내놓은 노래 ‘안녕 나야’의 가사다. 가사에서 ‘신천역’이라는 지하철역 이름은 헤어진 연인과 함께 했던 공간을 일컫는 고유명사이다. 그만큼 애뜻하다.   
 
지하철 역이름 판매, 재정난 이해하지만 시민 공유재산 아닐까

▲ 시민들이 퇴근길에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을 이용하는 모습. <연힙뉴스>


노래 가사나 각종 콘텐츠에서 지하철과 역이름이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방송인 유재석씨 역시 2019년 내놓은 노래 ‘합정역 5번 출구’에서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인데 왜 우리는 갈라서야 하나, 아 합정역 5번 출구”라는 가사로 인기를 끌었다.

지하철 역이름이 다양한 콘텐츠에서 사랑을 받는 까닭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면서 우리 생활의 일부가 돼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들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지하철 역이름은 공공성을 갖게 됐고 당연히 다양한 콘텐츠에 쉽게 녹아들어간다. 지하철 역이름은 저작권이나 상표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시민 모두의 재산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역이름을 시장에 내놨다. 이른바 '역명 병기 사업'이다.

물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서울교통공사는 2017년 출범 첫 해에 4074억 원은 순손실을 본 뒤 2018년, 2019년 각각 5천억원 대의 순손실을 봤다. 서울교통공사의 순손실 규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더 커져 2020년에 1조 원을 넘어섰다. 2021년에는 1조8천억 원 정도로 추정된다.

서울교통공사는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2021년부터 역이름 팔기에 나섰다.

역명 병기 사업은 기업 등에 부기 역명을 판매하는 사업이다. 서울교통공사 출범 전인 2013년에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재정난을 이유로 처음 꺼내 들었지만 서울교통공사가 출범한 이후로는 처음이다.

역명 구매 수요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일 을지로3가역의 부기 역명이 신한카드에 역대 최고가인 계약기간 3년과 8억7400만 원에, 신용산역의 부기 역명은 아모레퍼시픽에 계약기간 3년과 3억8천만 원에 팔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교통공사가 역명 병기 사업을 시작한 2021년에 33개 역에서 25억 원 정도 매출을 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전보다 더 큰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새로 바뀔 ‘을지로3가(신한카드)역’과 같은 역이름을 떠올려보면 매일 출근길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의 한 명으로서 아쉬움과 씁쓸함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역의 이름은 생활의 일부가 됐고 공공의 재산이라 할 것인데 이를 시민의 동의도 없이 특정 기업의 홍보에 내맡기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역이나 기차역 등의 이름을 놓고 지역사회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드문 일도 아니다.

2018년 수도권 전철 1호선 군포역에 ‘지샘병원’이 부기되자 지역사회에서 100년 역사 군포역의 전통성과 가치가 지켜져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이견행 당시 군포시의회 의장은 “지역 대표성이 크지 않은 명칭이 부기 역명으로 삽입되는 문제에 대해 여론이 매우 좋지 않다면 생각해 볼 문제”라며 “이번 기회에 군포역이 군포시민에게 주는 역사적 가치와 전통성을 보존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역 이름의 완전한 변경이 아닌 뒤에 붙이는 부기 역명이라도 각종 구조물과 안내 방송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됐을 때 효과는 가벼이 볼 수 없다.

부기 역명의 경제적 효과를 정확히 분석한 통계는 없으나 기관이나 기업이 부기 역명에 높은 홍보 효과를 느끼는 것은 분명하다.

부기 역명을 놓고 여러 기관이 경쟁을 벌이는 일이 흔한 데다 현재까지 부기 역명을 사용하고 있는 기관, 기업들 대다수가 계약기간 연장을 선택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무임승차에 국고보조를 받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 운임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해 조 단위 손실을 보고 있는 상황에서 역명 병기 사업은 그나마 서울교통공사가 자체적으로 추진해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익사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이름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면 당장 재정난으로 역이름이 '고작' 연간 몇억 원에 팔려가는 상황은 아쉬움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 누군가는 연인과 헤어진 지하철역을 ‘을지로역’이 아니라 '신한카드역'이라 떠올려야 할지 모른다. 세상이 조금 더 각박해지는 것인가. [비즈니스포스트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