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자본이 국내 상장기업을 인수한 뒤 자진상장폐지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현금 유동성이 풍부해 증시를 통한 자금조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기업들은 빠른 의사결정으로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상장폐지를 추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장의 감시에서 벗어나면서 기술유출의 창구로 활용되거나 해외자본의 사금고화하는 일도 있다.
도레이케미칼이 추진하는 하고 있는 자진상장폐지를 둘러싼 갈등도 이런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도레이케미칼, 자진 상장폐지 난항
13일 업계에 따르면 도레이케미칼이 추진하고 있는 자진상장폐지가 소액주주들의 반발에 부닥쳐 난항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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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관 도레이케미칼 회장. |
도레이케미칼은 지난해 두 차례 공개매수를 진행하며 자진상장폐지을 추진했으나 요건인 지분 95% 확보에 실패했다.
도레이케미칼의 자진상장폐지에 반대하는 소액주주들은 이미 도레이케미칼 지분 5.1%를 확보해 자진상장폐지를 저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소액주주들은 지난 2월 도레이케미칼의 회계장부열람 소송을 제기했다.
소액주주 모임은 “도레이케미칼은 지난해 3월 자진상장폐지를 추진할 움직임을 보였는데 직전 분기 알짜 사업부에 대규모 자산 손상차손을 반영했다”며 “성장성이 큰 사업부에 손실을 반영한 데 의혹이 있어 소송을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소액주주 모임은 도레이케미칼이 주주들의 감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통해 핵심기술들이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자진상장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로 꼽는다.
소액주주 모임은 “비상장기업이 되면 외부의 감시를 벗어나 도레이케미칼의 알짜 자산과 기술이 소리소문 없이 국외로 유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 외국계 자본, 상장폐지 통해 ‘먹튀’ 행위 반복
전문가들은 외국계 자본이 국내 상장기업들의 자진상장폐지 과정에서 이른바 ‘먹튀’ 자본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특히 사모펀드의 경우 상장기업을 인수한 뒤 상장폐지하는 것이 공식처럼 돼 있다.
부실한 회사를 인수한 뒤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여 회사를 비싸게 되파는 것이 사모펀드의 수익 실현 전략이다.
사모펀드는 이를 위해 인수한 상장회사를 상장폐지한 뒤 조용히 기업 구조조정을 진행하려고 한다.
증시에 그대로 놔 둘 경우 사업과 인력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소액투자자의 눈치를 보게 되면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기 어렵다.
코스닥 상장기업이었던 에스디는 글로벌 바이오기업 인버니스에 인수된 뒤 자진상장폐지됐다. 에스디는 2014년 말 540억 원의 배당을 실시했는데 인버니스의 사금고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표적 TV 브라운관 유리제조 기업인 한국전기초자도 일본기업인 아사히 글래스에 의해 자진상장폐지 된 뒤 자산 대부분을 유동화하고 모든 사업을 정리해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 델컴퓨터의 이유있는 자진상장폐지
델컴퓨터의 자진상장폐지는 이런 상장폐지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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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델 델컴퓨터 CEO. |
마이클 델 델컴퓨터 창업자는 2013년 주도적으로 사모펀드를 끌어들여 자진상장폐지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클 델은 사모펀드에 249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다.
델컴퓨터는 2008년 이후 성장이 정체됐지만 2012년 620억 달러의 매출을 냈을 정도로 탄탄한 수익구조를 보유한 기업이었다. 이 때문에 업계 관계자들은 델컴퓨터의 자진상장폐지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부실기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진해 상장폐지를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마이클 델이 단기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회사가치를 올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상장폐지를 추진한 것으로 분석한다.
주식시장의 투자자들은 대개 주식가치를 올리기 위한 회사의 전략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에 따라 상장기업의 경영자들은 주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중장기적 전략보다 단기실적에만 매달리게 된다.
마이크 델은 자진상장폐지와 관련해 “주주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압박을 벗어나 책임자들에게 의사결정의 유연성을 마련해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델컴퓨터의 자진상장폐지는 창업자가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진한 것”이라며 “창업자가 소유한 돈까지 쏟아부으며 배수진을 친 것은 시장에 우리를 믿고 기다려 달라는 긍정적 신호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