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필의 CEO 책쓰기] CEO에 오른 당신, 만년필을 꺼내 기록해보시라

▲ 이강필 커리어케어 출판사업본부장.

오랜만에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왁자지껄했다.

머리카락 색깔과 개수로 시작된 세월 얘기는 몇 순배가 돌면서 우리의 '그 시절'에 유치찬란한 각자의 추억담으로 넘어갔다. 다 '오징어 게임' 탓이리라.

취기에 눈꺼풀이 살짝 무거워지려는 찰라 한 친구의 입에서 귀를 깨우는 단어가 나왔다. 문방구.

아, 문방구! 문구점, 문구센터 등 문방구를 이르는 단어는 다양하지만 연필과 공책 스케치북 사던 추억을 일깨우는 이름으로는 문방구가 제격이다.

어느 녀석은 문간에 늘어놓은 딱지와 구슬 조잡스런 장난감들을, 또 다른 녀석은 연탄 하나를 놓고 파는 쫀드기 구이나 뻔데기 설탕뽑기 달고나 따위 주전부리를 떠올렸다(우리 동네에서 달고나는 국자 안에 사각의 포도당 덩어리에 정체불명의 누런 물을 부어 끌여내는 '무엇'이었고 요즘 유행하는 달고나는 '뽑기'라고 불렀다).

내가 떠올린 문방구의 기억은 벽면 한 칸에 가지런히 진열된 형형색색의 필기구다.

당시의 문방구 구색이 빈약했음을 고려한다면 다분히 세월이 흐른 뒤에 새겨진 대형문구점의 장면과 혼합된 시각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어린 눈에 들어온 동네 문방구의 연필과 볼펜 더미의 무지개는 '찰리의 초콜릿공장'에 버금가는 꿈의 공장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그저 학교 준비물을 사는 정도였던 문방구에 단골이 된 것은 대략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처음으로 샤프란 이름의 기계식 연필을 접하면서부터다.

손잡이가 달린 자동 연필깎기를 선물받아 연필 깎는데 큰 수고로움이 없던 터였지만 나는 이 신기한 필기구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얇디 얇은 심을 넣고 몇 번 누르면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는 물건이라니······.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께 각종 이유로 돈을 타내 사들인 샤프로 필통을 채웠다.

초등학교 시절이 연필의 시대라면 중학교 입학 이후는 볼펜과 만년필의 시대였다.

당시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는 연필 이외에 볼펜 같은 잉크형 필기구를 못 쓰게 했다. 빨리 중학생이 되고 싶었던 데는 문제의 그 만년필을 폼 나게 써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특히 우리집은 중학생이 되면 손목시계와 만년필을 사주는 전통이 있었다.

교복을 사던 날 서울 종로2가 보신각 옆에 있던 빠이롯드에 데리고 간 아버지는 내가 고를 새도 없이 하나를 집어들어 포장을 맡겼다. "공부 열심히 해라"란 말씀과 함께 내 손에 그 물건이 전해졌을 때의 감동이란!

첫 만년필을 '득템'하고 며칠 뒤 친척으로부터 아피스란 상표의 만년필을 하나 더 선물 받았는데 두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막 배우기 시작한 영어 단어를 백지에 가득 써본 기억이 삼삼하다.

필기구에 '삘이 꽂힌' 이유는 알 수 없다.

뭐가 됐든 흰 종이 위에 검은색이 칠해지는 모습이 좋았고 필기구 끝이 종이와 만날 때 나는 사각거림이 좋았다. 한때 붓글씨를 배우던 시절 화선지에 먹물이 묻혀질 때의 느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과 관련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잠깐이나마 원고지에 글을 쓰는 경험을 하고 바로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했다.

물론 기록에 동원된 도구가 펜과 종이에서 키보드와 모니터로 바뀌긴 했어도 흰 공간을 마주할 때의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다. 껌뻑껌뻑하며 '어서 글을 채우라'고 강요하는 커서의 공포가 필기구보다 더 속도감 있게 전해졌다는 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까.

나이를 먹은 뒤 아버지의 입학선물이 왜 만년필이었을지를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내린 해석은 이랬다. 이제는 내가 연필처럼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한 획 한 획이 엇나가면 고쳐 쓸 수 없는 인생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뜻이 아니었을까.

이런 의미 부여가 선물을 받았던 그 시절에 가능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성숙한 인간이 돼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필기구 수집가이지 이것들로 그다지 생산적 일을 해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연필이 나빠서 공부를 못했다'는 변명은 차마 할 수 없는····.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몇몇 큰 기업에서는 임원 승진을 하면 승진자의 이름이 각인된 고급 만년필을 축하선물로 줬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수학자 존 내시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뷰티블 마인드'에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동료 교수들이 평생의 업적을 이룩한 노교수에게 존경의 뜻으로 만년필을 놓고 갔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은 큰 업적을 남기라는 희망을 담은 선물이냐 아니면 그 결과에 따른 찬사이냐일 뿐이다.

영화건 현실이건 왜 만년필일까?

아마도 이는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만년필에 내가 내린 의미 부여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저 '일 잘하라'는 뜻이라면 회사는 최고급 기종의 노트북을 줬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이 평생 기록할 만한 업적을 세워보라고 그리고 이를 당신의 언어로 기록해보라는 뜻이 더 강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인사철이다. 여기저기서 임원인사를 알리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 회사의 임원이 된다는 것은 개인에게 더 없는 자부심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운동선수에게 국가대표로 선발된 날이 가장 기쁜 날이어서는 안 된다. 우승을 해야 그 자리에 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원 중의 임원인 CEO는 조직의 여러 임원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게 맡은 일을 실행해 낸 우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다.

CEO가 된 당신, 오늘 다시 임원 승진 때 받은 만년필을 들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며 각오를 다져보시라.

눈 앞에 있는 산적한 현안들 이를테면 조직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혁신하는 일, 지금보다 더 큰 시장을 만들어내는 일, 세계를 삼킬 제품을 개발하는 일은 모두 최고경영자의 펜촉 앞에 달려 있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하나 매듭지어질 때마다 아니 매순간 최고경영자로서 한 일을 노트에 적어나가시라.

해결된 문제가 늘어나는 만큼 최고경영자의 노트는 검은 잉크로 채워질 것이고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어 당신 앞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들이 늘어나야 한국기업의 경영 노하우가 축적되고 공유될 수 있다.

기업인과 경영자의 책을 주로 출판하는 내 입장에서도 책을 쓰는 CEO의 출현은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강필 커리어케어 출판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