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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O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 |
디자인의 혁신은 ‘사람’을 중심에 둘 때 가능하다. 애플의 마우스를 디자인하는 등 디자인업계의 맥킨지라 불리는 ‘IDEO(아이데오)’의 켈리 형제나, 스티브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라고 알려진 애플의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 모두 마찬가지였다.
IT업계에서도 디자인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디자이너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켈리 형제의 아이데오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혁신적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 삼성전자도 자동차 디자이너를 영입해 생활가전을 디자인하게 했다. 삼성전자의 이런 시도는 성공할까?
◆ 켈리 형제, 세계 최고의 디자인 회사를 일군 비결
최초의 애플 마우스, 개인휴대단말기(PDA) 팜(Palm), 삼성 모니터, 폴라로이드 카메라, P&G 어린이칫솔, 현대카드 시리즈 등등.
켈리 형제가 세운 디자인 회사 IDEO(아이데오)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혁신적 디자인을 내놓았다. IDEO는 사용자를 배려한 디자인을 중시하는 세계최고 디자인 컨설팅회사다. IDEO는 ‘디자인업계의 맥킨지’로 불린다. 고객들이 의뢰하면 뭐든지 IDEO 디자이너들이 힘을 합쳐 창의적 디자인을 창조해 낸다.
형인 데이비드 켈리는 IDEO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실리콘밸리 혁신기업들이 극찬하는 스탠퍼드 디자인스쿨의 석좌교수도 겸임하고 있다. 동생인 톰 캘리는 IDEO를 크게 키운 최고경영자(CEO)다. 그의 경영능력 덕분에 IDEO는 직원 15명에서 60명이 넘는 글로벌기업으로 거듭났다.
형 데이비드는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보잉사에 취직했지만 이내 학교로 돌아갔다. 스탠퍼드 디자인 석사학위를 받고 창업했다. 그는 “개인의 창의력을 무시당한 채 하루 10시간씩 일하는 조직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며 1978년 허름한 건물에 디자인회사를 직접 차렸다. 여기서 스티브 잡스가 의뢰한 ‘애플 마우스’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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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켈리(왼쪽)와 톰 켈리 |
데이비드는 회사의 목표를 “창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으로 잡았다. 한 때 암에 걸려 생존확률이 40%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고 나서 인생에 대해 고심한 결과다. 그때부터 그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당장 실행하는 추진력을 키웠다. 그는 요즘도 “누구나 자신감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직원들을 독려한다.
회사를 차린 지 10여년 뒤인 1987년 동생 톰이 회사에 합류했다. 톰은 UC버클리대 경영전문대학원(MBA)을 나와 GE 등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는 형 데이비드가 부족했던 경영능력과 순발력이 뛰어났다.
톰은 지금의 IDEO라는 이름을 짓고 직원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는 자유분방한 기업문화 분위기도 조성했다. IDEO는 창의적 조직문화로 국내외 기업들에게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IDEA 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은 임원실이 아닌 주방이다.
IDEO 직원들은 주방에서 회의를 하고 벽에 포스트잇과 사진을 자유롭게 붙인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바닥부터 천장까지 아이디어를 쓸 수 있는 칠판이 이어져 있다.
톰은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디자인에서 사용자경험(UX)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혁신의 제1원칙이 ‘사람’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라고 했다. 톰은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있어도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톰은 “사람을 잘 관찰하고 아직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한 욕구를 발굴해낼 때 비로소 혁신이 창출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는 디자인은 결국 사용자의 숨은 욕구를 찾아내는 일임을 뜻한다
◆ 조나단 아이브, 스티브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엔지니어는 그 디자인에 맞게 만든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있는 동안에 항상 주변에 강조한 말이다. 제품을 만들기 전에 디자인을 먼저 하고 그 디자인에 맞춰 기술적 문제는 나중에 해결한다는 의미다.
조나단 아이브는 이런 잡스의 디자인 철학을 함께했다. 그래서 잡스의 ‘영혼의 파트너’라고 불린다. 아이브는 회사 내에서 조나단이란 이름보다 ‘조니(Jony)’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잡스는 시도때도 없이 조니를 외치며 애플의 디자인과 경영에 관련한 모든 사항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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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아이브(왼쪽)과 스티브 잡스(오른쪽) |
아이브는 29세 나이에 애플의 디자인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30대에 애플의 단순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디자인을 내놓았다. 45세에 디자이너로서 최초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0인에 꼽혀 현재 산업 디자이너들의 살아있는 ‘우상’이 됐다.
잡스는 독단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반면 아이브는 내성적이고 잘 나서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아이브는 끈기와 집념이 매우 강했다. 아이브는 상대방에게 디자인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백 개의 모형과 시제품을 만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잡스와 아이브는 디자인과 경영철학이 모두 통했다. 사용자에게 완벽하게 일체되는 디자인을 원했다. 또 디자인 디테일에 광적으로 집착해 둘은 곧 찰떡궁합이 됐다.
잡스는 틈만 나면 아이브를 불렀다. 디자인팀이 아닌 다른 부서 직원들은 차별을 받는다고 느꼈을 정도다. 잡스는 디자인팀에 와서도 아이브와 단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심지어 주변의 다른 디자이너들은 잡스와 아이브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음악 볼륨을 높여줬다.
아이브는 디자인을 할 때 ‘디자인 스토리’를 가장 중시했다.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과 감성을 안겨줄 것인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그는 평소 “디자인이 보이지 않게 하라”고 역설적인 말을 했다. 사용자도 모르게 디자인이 제품의 본질이 되어 사용자에게 물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즉 애플의 디자인은 애플 제품 그 자체인 셈이다.
잡스는 모든 공정에 디자이너들을 투입했다. 나사못 하나를 쓸 때도 디자이너들의 최고 수장인 아이브와 의논했다. 그 결과 아이브의 손에서 애플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일관된 디자인이 탄생했다.
아이브는 크리에이티브 업계의 오스카 상’이라는 불리는 D&AD상을 제일 많이 수상했고 IDEA 금상, 레드닷 디자인상 등을 거머쥐었다. 그는 현재 애플의 디자인 총괄 수석 부사장이자 크리에이티브 부문의 총책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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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뱅글 |
◆ 크리스 뱅글, 삼성전자에 온 ‘BMW 영웅’
삼성전자는 애플을 추격하면서 잡스와 아이브가 디자인으로 성공한 것을 지켜봤다. 또 기아자동차가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면서 매출을 끌어올렸던 것도 확인했다. 삼성전자는 2011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크리스 뱅글을 가전제품 디자이너로 들이는 파격적인 계약을 한다.
크리스 뱅글은 17년 동안 BMW에서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그는 BMW에 들어간 지 10년 뒤 혁명이라고 불릴만한 BMW 7시리즈를 만들어 낸다. 그의 디자인은 기존의 클래식한 디자인과 너무 달라 한 때 BMW 매니아들에게 살인협박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뱅글이 2002년 발표한 날렵한 BMW 트렁크 디자인은 ‘뱅글 엉덩이(bangle butt)’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디자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디자인철학으로 제품 본연의 기능을 살려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덕분에 그는 기아자동차의 피터 슈라이어, 아우디의 윌터 드 실바와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다.
이런 뱅글이 돌연 삼성전자 가전 부문에서 제안한 디자인 협력을 받아들였다. 자동차가 아닌 새로운 제품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현재 거액의 몸값에 비해 ‘뱅글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뱅글을 데려온 이유는 애플 제품처럼 ‘멀리서만 봐도 삼성제품’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뱅글이 자동차 디자인에 맞춰져 있다 보니 그의 디자인을 짧은 시간에 바꾸기에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뱅글이 자동차와 완전히 다른 가전제품의 소비자 사용자경험(UX)을 완벽히 이해하고 디자인에 반영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뱅글의 디자인이 최초로 가미된 세탁기 ‘블루 크리스탈’이 지난 1월 국제가전전시회(CES 2014)에서 공개됐다. 윤부근 삼성전자 생활가전부문 사장은 “삼성전자가 주도한 디자인에 크리스뱅글 디자인이 더해진 제품”이라고 소개해 뱅글의 존재감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뱅글과 3년 계약이 오는 6월 종료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뱅글과 마스터디자이너 협력관계는 3년으로 마무리 되지만 새로운 협력관계를 이어갈 계획도 갖고 있다”며 “지금까지 디자인분야에 한정했지만 좀더 분야를 넓혀 경영 전반에 걸쳐 협력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혁신적인 디자인을 애타게 찾고 있는 삼성전자가 향후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