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케미칼이 뜨고 있다. 반도체업황 수혜에 더해 2차전지소재까지 공급하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한솔그룹으로 넓혀서 보면 미래를 낙관하기 쉽지 않다.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해 30년 동안 독자적 길을 걸어오면서 한때는 재계 10위를 넘봤지만 중심인 한솔제지 위상이 예전 같지 않고 준대기업집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한솔그룹은 한솔케미칼의 성장과 한솔제지의 회복으로 재도약할 수 있을까?
한솔그룹은 오너3세 세대로 접어들고 있는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음 시대를 준비할까?
◆ 한솔케미칼, 올해도 전자소재사업으로 최대실적 예약
한솔케미칼을 바라보는 시장의 눈높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증권사들의 실적 전망을 종합하면 한솔케미칼은 올해 연결기준으로 매출 7422억 원, 영업이익 2045억 원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보다 매출은 19.9%, 영업이익은 34.6% 늘어나는 것이다.
2022년에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매출 8천억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호적 실적 전망에 힘입어 주가도 강세를 보인다.
한솔케미칼 주가는 석 달 전만 해도 15만 원 수준이었으나 최근 25만 원 선을 넘보고 있다. 한솔케미칼의 잠재력이 크다며 목표주가를 30만 원 이상으로 제시하는 증권사도 나온다.
김승희 DS투자증권 연구원은 “아직 국내 전자소재업체 대비 저평가받고 있으나 기존 정밀화학 부문에 더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을 아우르는 첨단 전자소재업체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주가는 점차 다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솔케미칼의 기업가치를 이끄는 핵심은 전자소재사업이다.
한솔케미칼은 애초 종이 펄프나 섬유를 표백하거나 반도체를 세정할 때 사용되는 과산화수소를 생산하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전방산업 고도화에 따라 전자재료와 박막재료 등 전자소재 분야에 힘을 실었고 이제는 전자소재사업이 한솔케미칼의 새 성장동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업황 호조에 따른 과산화수소 수요 증가가 한솔케미칼의 실적 증가에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장에서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은 QLED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퀀텀닷(QD)소재와 2차전지소재다.
실제로 정밀화학제품의 매출 증가세는 분기별로 5% 안팎의 성장세를 보이지만 퀀텀닷과 2차전지 등 전자소재제품의 매출 증가세는 200~300% 안팎으로 매우 높다.
김경민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한솔케미칼은 반도체 공정소재 공급사의 롤모델”이라며 “2차전지소재의 경우 2020년까지 매출 비중이 한 자릿수였지만 올해는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를 상회할 것”이라고 바라보기도 했다.
한솔케미칼이 지난해 인수한 특수가스회사 솔머티리얼즈의 실적은 올해부터 한솔케미칼 실적에 본격적으로 반영된다. 이 효과까지 더해지는 점을 감안하면 한솔케미칼의 고성장 기조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한솔케미칼, 든든한 우군 삼성과 밀월관계
한솔케미칼이 실적 고공행진을 거듭할 수 있는 배경에는 삼성그룹이 있다.
한솔케미칼이 생산하는 과산화수소를 필요로 하는 회사는 과거만 해도 제지나 섬유업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제지와 섬유산업이 하향기를 걸으면서 이제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기업이 주요 고객기업이 됐다.
삼성전자가 국내를 대표하는 반도체기업인 만큼 한솔케미칼이 반도체업황 호조에 따라 실적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한솔케미칼은 삼성전자의 시안 공장과 P1공장에 반도체 세정용 과산화수소를 독점공급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P2공장 납품 물량도 늘려가고 있다.
물론 한솔케미칼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대만 TSMC 등 국내외 여러 반도체회사도 고객으로 두고 있다.
삼성그룹의 반도체사업만이 한솔그룹의 성장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한솔케미칼은 TV부문에서도 삼성전자를 든든한 우군으로 두고 있다.
삼성전자는 TV사업에서 QLED(양자점발광다이오드)TV를 주력으로 밀고 있다.
QLED는 스스로 빛을 내는 퀀텀닷(QD) 소재(나노미터 단위의 초미세 반도체 입자)를 활용한 디스플레이로 만든 TV를 말한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퀀텀닷소재는 밝기의 표현범위가 넓다는 장점이 있어 다양한 색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고 명암비도 좋아 빛과 어둠 속 디테일을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
올레드는 자체발광 유기디스플레이의 특성상 ‘번인’(동일한 영상이 장기간 반복될 경우 화면에 잔상이 영구적으로 나타나는 패널의 결함) 현상을 내지만 QLED는 무기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삼성전자는 설명한다.
QLED의 핵심인 퀀텀닷소재를 양산하는 곳이 바로 한솔케미칼이다.
애초 퀀텀닷소재 기술을 개발한 곳은 삼성전자의 미래 혁신기술을 연구하는 중앙연구소인 삼성종합기술원이었다. 한솔케미칼은 삼성종합기술원에 이 기술을 제공받음으로써 퀀텀닷소재시장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사실상 삼성그룹이 한솔그룹 측에 물량을 밀어주기로 함으로써 한솔케미칼이 전자소재분야의 강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솔케미칼이 삼성SDI와 협력하고 있다는 점도 삼성그룹과 한솔그룹의 밀월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솔케미칼은 전기차배터리의 핵심소재인 실리콘계 음극재를 2022년부터 생산해 삼성SDI에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실리콘계 음극재를 생산하는 기술도 삼성종합기술원이 개발한 것인데 퀀텀닷소재 기술에 이어 두 번째로 기술을 이전받는 것이다.
◆ 삼성가 뿌리둔 한솔그룹의 영욕
한솔그룹 뿌리는 바로 삼성그룹이다.
CJ그룹, 신세계그룹 등도 삼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한솔그룹은 이 가운데 처음으로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를 한 그룹이다.
이병철 창업주의 장녀이자 이건희 회장의 누나인 이인희 고문은 1991년 삼성그룹 계열사인 전주제지(현 한솔제지)를 통해 계열분리를 했다.
이인희 고문은 이병철 회장이 자서전에서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인데”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병철 회장의 사업적 DNA를 잘 물려받은 오너경영인이었다.
이 고문은 계열분리 이후 한솔제지를 그룹체제로 전환하고 공격적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분야를 화학과 금융 등으로 다각화했다. 1995년에는 정보통신사업단을 꾸려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선언해 한솔PCS라는 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자본금이 적은 기업을 사들여 인수한 회사이름으로 전환사채를 발행하거나 증자로 자금을 마련한 뒤 그 돈을 종잣돈으로 또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한솔그룹의 인수합병 성장전략을 놓고 ‘집을 세놓고 그 돈으로 또 다른 집을 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 고문의 공격적 사업 확장으로 한솔그룹은 1990년대 들어 가장 사세가 확장된 재벌그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삼성그룹에서 분가하던 1991년만 해도 재계순위 50위 안에도 들지 못했지만 9년 만인 2000년에는 순위가 11위까지 수직으로 상승했다.
한때 전국 대학생 6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한솔그룹이 2000년대에 국내 재계순위 10위권에 들 유력한 그룹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 고문은 1990년대 후반 한솔그룹의 주력사업을 제지업 중심의 제조업을 포함해 정보통신과 무역, 금융분야 등 네 축으로 재편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한솔그룹은 IMF 위기를 겪으면서 긴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다. 그룹의 중심인 한솔제지의 일부 사업부문을 매각하고 야심 차게 도전했던 이동통신사업에서도 손을 떼는 등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외형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한솔그룹의 경영권 승계도 이뤄졌다.
이 고문은 1998년 한솔그룹의 금융부문을 첫째 아들인 조동혁 부회장에게, 정보통신부문을 둘째 아들인 조동만 부회장에게, 제지부문을 셋째 아들인
조동길 부회장에게 맡겼다. 한솔그룹 2세 경영자들에게 책임경영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IMF 사태로 금융과 정보통신 계열사들이 대부분 무너지자 2002년 조동혁 부회장을 그룹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하고 그룹의 경영권을 셋째 아들인
조동길 회장에게 승계했다.
조동길 회장은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솔제지 실적을 비교적 잘 방어하고 외자 유치에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았다.
이 고문은
조동길 회장에게 그룹 수장을 물려준 뒤 스스로 고문으로 물러났다.
조동길 회장은 이후에도 구조조정을 꾸준히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 5조 원이 넘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지정하는 대규모기업집단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한솔그룹은 2013년 다시 대규모기업집단에 포함됐다가 2019년 또 빠졌다.
◆ 한솔그룹 부활에 한솔제지 회복도 관건, 인수합병에 눈독
한솔케미칼이 고성장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는 점은 한솔그룹에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솔그룹의 모태기업인 한솔제지의 실적 회복도 한솔그룹의 옛 위상을 되찾는 일에 매우 중요하다.
한솔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매출을 살펴보면 한솔케미칼과 한솔로지스틱스가 매출 5천억~6천억 원대를 보이지만 한솔제지는 연 매출로 2조 원가량을 냈을 정도로 몸집이 크다.
하지만 한솔제지의 상황은 좋지 않다.
한솔제지는 2020년에 매출 1조5099억 원, 영업이익 946억 원을 냈다. 2019년보다 매출은 10.1%, 영업이익은 1.5% 줄어든 것이며 실적 하락이 2년 연속 이어진 것이다.
한솔제지는 과거 삼성그룹 계열사로 있을 때 중앙일보에 신문지를 공급하면서 기반을 닦았고 이후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원으로 사세를 키웠다. 현재도 인쇄용지와 산업용지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모바일이 발달하면서 제지업계가 전반적으로 쇠퇴하면서 한솔제지가 좀처럼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솔제지도 “인쇄용지사업부문은 과거 30년 동안 GDP보다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나 최근 전자매체의 발달로 전반적 성장 속도는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며 “소비와 공급 증가율이 둔화하는 성숙기에 진입했다”고 바라보고 있다.
한솔제지는 제지를 뛰어넘어 친환경 포장재와 나노신소재사업 등을 벌이며 새 활로를 확보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한솔제지의 2021년 실적이 겨우 2017년 수준을 회복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한솔제지는 2020년 3분기 기업설명회에서 “우선순위는 여전히 차입금 줄이는 것이지만 이제는 좋은 투자기회 나오면 잡을 수 있는 여력이 생긴 상태”라며 향후 좋은 기업을 인수해 외형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한솔제지는 실제로 최근 수년 사이에 태림포장과 전주페이퍼 등의 인수 후보군으로 거론됐으며 실제로 태림포장 인수전에서는 본입찰을 위한 실사까지 진행했다. 하지만 두 인수전에서 모두 발을 빼면서 현재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오너3세체제 몸풀어, 조연주 ‘두각’ 조성민 ‘수업중’
한솔그룹의 재도약 행보와 함께 오너3세 경영체제가 점차 무르익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가장 관심을 받는 인물은 조동혁 명예회장의 장녀인
조연주 한솔케미칼 부회장이다. 조 부회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장조카이기도 하다.
조 부회장의 승진은 범삼성가 4세, 한솔그룹으로 따지면 오너3세 가운데 가장 빠른 부회장 승진인 데다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 정유경 신세계 사장 등 범삼성가 여성3세 오너경영인보다도 빠르게 부회장을 달았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한솔케미칼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성장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이 초고속 승진의 발판이 됐다.
조 부회장은 미국 웨슬리대학교를 졸업한 뒤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졸업한 뒤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했고 이후 속옷기업으로 유명한 빅토리아시크릿에서 애널리스트로도 활동했다.
조 부회장은 한솔케미칼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전자소재와 산업용 테이프를 제조하는 대만기업 테이팩스를 인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2019년 진행된 솔머티리얼즈 인수전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15년 부사장, 2019년 사장에 이어 2020년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조 부회장의 한솔케미칼 내 입지는 단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5년부터 한솔케미칼 사내이사를 맡고 있으며 2019년부터는 테이팩스 사내이사도 겸직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발간된 한솔케미칼 40년사에 직접 등장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조 부회장은 “확실하기 때문에 대범할 수 있고 거시적이기 때문에 미래의 성장을 약속할 수 있다"며 “40주년의 이정표를 지나는 우리의 방향과 행동은 현재진행형”이라며 임직원을 격려했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장남 조성민씨는 조 부회장과 비교해 존재감이 확연히 부각되지는 않는다.
조성민씨는 한솔제지에서 기획담당 임원으로 일하며 경영수업 받고 있다. 아직 나이가 어려 경영전면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한솔그룹 오너3세체제는 어떻게 되나
조동길 회장이 1955년 태어나 올해 67세가 됐다는 점을 감안할 때 조만간 한솔그룹의 경영체제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재계는 바라본다.
하지만 한솔그룹의 지분구조를 살펴봤을 때 오너3세시대의 경영이 어떻게 이뤄질지 방향을 섣불리 예상하기는 힘들다.
한솔그룹 지주사 한솔홀딩스 지분은
조동길 회장이 17.23%, 조성민씨가 0.76%를 들고 있다. 오너일가의 직접 지분이 18%에 불과해 안정적 경영권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솔케미칼은 한솔홀딩스와 다른 축을 형성하고 있다.
한솔케미칼의 최대주주는 조동혁 명예회장(14.47%)이며
조동길 회장이 0.31%, 조동혁 명예회장의 부인 이정남씨가 0.13%, 그리고
조연주 부회장이 0.03%를 들고 있다. 오너일가의 지분을 다 더해봐야 15%가량에 불과하다.
정리하면 ‘
조동길 조성민→한솔홀딩스→한솔제지’로 이어지는 한 축, ‘조동혁
조연주→한솔케미칼→테이팩스’로 이어지는 한 축이다.
이런 구조를 살폈을 때 한솔그룹이 장기적으로 이인희 고문의 3남인
조동길 회장과 장남인 조동혁 명예회장의 계열분리로 이어질 것으로 시장은 예상해왔다.
그러나 한솔홀딩스와 한솔케미칼에 대한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낮다는 점, 한솔그룹의 외형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계열분리를 하면 사세 확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 어려움이 많다.
실제로 한솔그룹이 계열분리를 추진하려면 한솔케미칼이 보유한 한솔홀딩스 지분 4.31%를 정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조동길 회장의 한솔홀딩스 지배력이 더욱 낮아진다. 한솔홀딩스의 경영권을 지키려면 조동혁 명예회장 측의 한솔케미칼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조동길 회장과 조성민씨, 조동혁 명예회장과
조연주 부회장 사이의 느슨한 협력 및 공존관계가 한동안 지속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한솔그룹이 앞으로 사촌경영으로 갈지 혹은 계열분리로 갈지 주목된다. [채널Who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