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을 풀기 위해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나설까?
그동안 계열사 선에서 합의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만큼 빠른 합의를 위해 최 회장이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결로 LG에너지솔루션이 합의 논의에서 우위에 서게 됐다.
구 회장이 만족할 수 있는 합의조건을 최 회장이 제시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보이는 데 배터리 분리막을 만드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 지분이 중요한 협상 카드로 쓰일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15일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공식 취임하기에 앞서 현재 구속 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제외한 4대그룹 총수 모임을 이르면 2월 안에 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4대그룹 총수들의 만남은 지난해 9월, 11월, 12월에도 이뤄졌다. 최 회장이 ‘재계의 얼굴’인 대한상의 회장 취임을 앞두고 있는 만큼 취임에 앞서 재계 현안을 놓고 다른 그룹 총수들과 의견을 공유하고자 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의 시선은 최 회장과
구광모 회장의 만남 가능성에 쏠려 있다. 두 총수의 만남에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과 관련한 합의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동안 계열사 차원의 합의 논의에서는 제대로 된 협상조차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금을 놓고 LG에너지솔루션이 최대 3조 원, SK이노베이션이 1조 원 미만을 굽히지 않으며 의견차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합의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 딱히 정해지지는 않았다. 다만 최 회장의 대한상의 회장 취임일은 3월24일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 회장으로서는 대한상의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논란을 털어내고자 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배터리 분쟁과 관련해 계열사 차원에서의 협상이 지지부진했던 만큼 직접 나서서 총수 차원에서 합의의 물꼬를 트려 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최 회장이 직접 나설 사업적 이유도 있다. SK그룹은 미래 먹거리로 모빌리티를 낙점하고 관련 계열사들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으며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를 그 선봉에 세우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는 개별 계열사 차원의 사업이라기보다 그룹의 미래전략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사업인 만큼 최 회장으로서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총수들 사이의 합의 논의가 현실화한다면 최 회장은 구 회장이 만족할만한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합의금의 규모 측면에서 상당 부분 양보하게 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10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기밀 침해소송에서 SK이노베이션의 패소 판결을 내리고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와 관련 부품들을 미국이 10년 동안 수입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증권업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국제무역위가 SK이노베이션에게 폴크스바겐과 포드 등 미국 고객사들에는 각각 2년, 4년 동안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유예기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강동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판결문에 따르면 이 유예기간은 폴크스바겐과 포드가 배터리 공급자를 교체할 수 있도록 준 시간이다”며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명분이 적어진 것이다”고 봤다.
SK이노베이션은 합의 논의가 장기화할수록 미국 소송전이 유럽과 중국으로 번질 가능성과 이에 따른 고객사 이탈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최 회장에게 배터리가 중요하듯 구 회장에게도 배터리가 중요하다는 점도 최 회장이 구 회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예상에 힘을 더한다.
SK그룹과 마찬가지로 LG그룹도 미래 먹거리로 모빌리티를 낙점하고 계열사들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도 그룹 미래전략의 핵심적 사업이며 LG그룹의 배터리 업력이 SK그룹보다 더 긴 만큼 관련 투자규모도 LG그룹이 SK그룹보다 많다.
다만 일각에서는 구 회장이 합의금의 규모에서 물러나지 않는 대신 지급 형태나 방식은 최 회장의 제안에 맞춰 줄 수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배터리업계에서는 이전부터 합의방식 가운데 하나로 SK이노베이션이 기업공개를 준비하는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지분 일부를 LG에너지솔루션이나 모회사 LG화학에 넘기는 방식으로 합의금을 줄이려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지배구조 변화를 수반하는 합의 방식인 만큼 이 가능성이 현실화하려면 그룹 총수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배터리 4대 핵심소재 가운데 하나인 분리막을 생산하는 회사로 기업가치가 5조 원으로 평가받는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사이에 합의금을 놓고 시각차가 큰 것은 전기차 배처리시장의 성장성이 주요한 배경으로 꼽히는 만큼 상장을 앞둔 SK아이이테크놀로지 지분은 협상의 카드로 활용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배터리업계 한 관계자는 “배터리는 한 회사가 소재부터 부품, 제품에 이르는 밸류체인 전반을 모두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산업이다”며 “소재를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은 사업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주요 요인이다”고 말했다.
구 회장으로서는 배터리 핵심소재회사의 지분을 확보해 배터리사업 안정성을 강화한다는 선택지가 나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분리막을 탑재하는 SK이노베이션 배터리는 화재사고가 단 한 건도 보고되지 않았을 만큼 안전성도 높다고 평가받는다.
최 회장이 SK아이이테크놀로지의 지분을 활용하는 방식의 합의 조건을 제시한다면 구 회장도 만족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공동 고객사인 폴크스바겐과 포드는 두 회사에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
유예기간을 2년밖에 받지 못한 폴크스바겐은 유예기간을 4년으로 늘려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할 정도로 다급함을 보이고 있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합의를 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에 앞서 2일
정세균 국무총리는 규제 샌드박스 2주년 성과보고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에게 “너무 법적 쟁송만 하지 말고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1월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도 “두 회사가 소송비용만 수천억 원에 이르는 싸움을 하면서 남(해외 경쟁사들) 좋은 일만 하고 있다”며 합의를 압박하기도 했다.
구 회장도 고객사와 정치권의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공산이 크다.
다만 LG그룹과 SK그룹 모두 배터리 분쟁의 합의 가능성을 놓고 극도로 말을 아끼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