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씨티그룹 최고경영자(CEO)로 지명된 제인 프레이저가 2019년 3월 워싱턴DC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리먼브라더스(Lehman brothers)가 리먼시스터즈(Lehman sisters)였다면 금융위기가 발생했을까.”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월가의 견고한 유리천장을 꼬집으며 한 말이다.
최근 미국 씨티그룹에서 여성 CEO(최고경영자)가 등장하면서 월가의 유리천장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마이클 코뱃 씨티그룹 CEO가 내년 2월 은퇴하고 제인 프레이저 씨티은행장 겸 글로벌소비자금융 대표가 자리를 이어받는다. 프레이저는 씨티그룹은 물론이고 미국 주요 은행을 통틀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CEO에 오른다.
미국 20위권 은행에서 여성 CEO가 나온 적은 있었지만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10대 은행에서 여성 CEO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씨티그룹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은행이다.
프레이저가 씨티그룹 CEO에 오르면서 월가의 유리천장에도 균열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금융권은 유리천장이 높고 견고하기로 유명하다. ‘월가는 전쟁터만큼이나 여성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말도 있다. 그동안 여러 여성 금융인들이 고위직에 오르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대부분 CFO(최고재무책임자)에서 만족해야 했다.
월가에서 CFO는 상대적으로 보수나 영향력이 떨어지는 자리로 여겨진다. 여성이 CFO에 올라도 큰 성과로도 보지 않는다. 가정에서 여성이 가계부를 쓰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관리하는 역할이 그대로 투영된 자리가 바로 CFO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등 대부분의 월스트리트 주요 은행은 남성들이 이끌어왔고 지금도 고집스럽게 그렇다”면서 “프레이저의 승진은 금융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큰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프레이저는 골드만삭스와 맥킨지앤드컴퍼니를 거쳐 2004년 씨티그룹에 합류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미국 하버드대 MBA를 취득했다. 지난해 씨티은행장 겸 글로벌소비자금융 대표로 발탁되면서 유력한 다음 CEO후보로 떠올랐다.
2015년 멕시코지점 회계 부정사건으로 씨티그룹이 곤경에 놓였을 때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남미사업 책임자로 지명돼 사태를 매끄럽게 수습하면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여러 여성들이 월가의 유리천장을 깰 것으로 기대받았지만 모두 좌절을 겪었다. 2000년대 초중반 몇몇 여성들이 ‘월가의 여제’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목을 받았지만 금융위기로 모두 정상을 코앞에 두고 회사를 떠났다.
한때 월가를 대표하는 여성으로 꼽히던 샐리 크로첵은 씨티그룹 CFO에서 씨티그룹 자산운용부문 대표로 경질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곧바로 뱅크오브아메리카로 영입됐지만 2년 뒤 실적 호조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고되는 굴욕을 겪었다.
모건스탠리의 공동사장을 지낸 조 크루즈도 마찬가지다.
25년 동안 모건스탠리에 몸담아 오면서 공격적 경영을 펼쳐 ‘크루즈 미사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건스탠리 최고경영자 존 맥의 후임으로 하마평에 올랐으나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비슷한 시기 리먼브러더스 CEO 리처드 풀드는 여성 CFO 에린 캘런을 희생양 삼아 쫓아내기도 했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여성 금융인들이 제물이 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회사 내부에서 생존게임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결국 사내 파워게임에 약한 여성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월가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스테이트스트리트은행은 2017년부터 경영진의 실적평가와 보상에 다양성 성과를 포함했다.
골드먼삭스는 2018년 경영진이 여성임직원 비율을 50%로 높인다는 목표를 밝혔다. 2021년까지 신입직원에서 남녀 비중을 똑같이 맞추는 걸 시작으로 성평등 조치를 이행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