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
농협이 동양매직 인수전에서 최고가를 써내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인수합병 시장에서 ‘알짜 매물’로 평가받고 있는 동양매직에 3천억 원을 제시했다. 동양매직 인수전에서 ‘재수’하고 있는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또 다시 고배를 마시게 될지 주목된다.
◆ 농협, 인수우선협상대상자 따낼까
9일 업계에 따르면 동양이 동양매직 인수우선협상대상자로 농협은행 프라이빗에쿼티(PE) 컨소시엄을 선정해달라고 8일 법원에 허가신청을 했다. 동양매직은 동양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다.
농협은행PE는 지난달 30일 마감된 동양매직 본입찰에서 최고입찰가격인 3천억 원 안팎의 금액을 제시했다. 지난해 매각협상에서 동양매직 매각자문사였던 골드만삭스가 제시했던 가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농협은행PE가 최고가를 써내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자 업계는 뜻밖이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매각을 주관하는 삼일회계법인이 동양매직의 기업가치를 1826억 원으로 책정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동양매직이 지난해 사상 최대실적인 221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몸값을 높였지만 시장에서 형성된 적정 인수가격은 2000억~2500억 원이었다. 인수 후보자들 사이에서 이마저도 높다는 얘기가 나왔다.
농협은행PE는 현재 투자자문회사인 글렌우드와 힘을 합쳐 인수에 나선 상태다. 농협은행PE 컨소시엄의 주축은 원래 일본 주방가전회사인 팔로마였다. 하지만 팔로마가 동양매직 렌탈사업부까지 통으로 인수해야 하는 데 대해 부담을 느끼며 빠졌다. 한 때 글렌우드가 렌탈사업부를 가져가고 나머지 제조부문을 팔로마가 인수하는 방안도 고려됐지만 노조반발 등을 고려해 결국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농협은행PE가 팔로마의 자리를 꿰차고 컨소시엄의 주축을 맡게 됐다. 업계는 농협은행이 동양매직 인수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조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농협은행PE는 ‘100년 전통’을 가진 팔로마만큼의 사업적 정통성이 없다. 하지만 농협 하나로마트 등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고 있어 동양매직 렌탈사업과 시너지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또 NH농협캐피탈을 통해 이미 할부금융과 리스사업을 하고 있는 점도 인수전 참여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글렌우드 입장에서 농협은행PE가 사업파트너가 된 것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팔로마가 주축이 돼 동양매직을 인수한다고 했을 때 국내 가스레인지시장이 일본계 기업들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가스레인지시장은 41%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린나이와 36% 점유율의 동양매직이 양분하고 있다. 현재 린나이 국내법인의 최대주주는 지분 97.7%를 가진 일본 린나이다. 팔로마가 동양매직을 인수하면 두 일본계 기업이 국내 가스레인지시장의 80% 이상을 과점하게 된다.
◆ 정지선, 인수전 ‘재수’ 실패하나
올해 두 번째 동양매직 인수에 나선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났다. 입찰가격이 공개되기 전까지 현대홈쇼핑을 앞세운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쟁자로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한앤컴퍼니나 교원그룹 정도가 거론됐다. 게다가 교원그룹이 본입찰에 불참하면서 정 회장의 승리가 가까워지는 듯 했다.
현재 기업은행PE와 아주아이비투자와 컨소시엄을 꾸린 현대백화점은 입찰금액 기준으로 3순위다. 농협은행PE에 이어 한앤컴퍼니가 두 번째로 높은 금액인 2900억 원대를 제시했고 현대백화점은 2850억 원을 써냈다고 알려졌다.
현대백화점은 팔로마가 인수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인수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자로 손꼽혔다. 일본기업에 대한 좋지 않은 국민정서도 있었고 외국기업으로의 매각 시 발생할 수도 있는 기술유출 문제도 제기됐기 때문이다. 또한 동양매직 내부에서 현대백화점으로의 매각을 선호한다는 말도 나오던 상태였다.
하지만 팔로마의 자리를 농협이 대체하게 되면서 이러한 효과도 사라지게 됐다. 동양매직 인수를 통해 현대홈쇼핑과 시너지를 기대했던 정 회장이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정 회장은 안정적 자금조달과 임직원 고용승계 등 전체 심사기준에서 20%를 차지하는 ‘비가격 요소’에 기대를 건 듯하다. 현대백화점이 대기업인 데다가 홈쇼핑이라는 강력한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사보다 낮은 가격을 제출해도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농협의 참여로 비가격 요소의 이점이 사라져 입찰가격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업계는 아직 정 회장에게 희망이 남았다고 본다. 농협은행PE 컨소시엄이 재무적 투자자(FI)이기 때문이다. 재무적 투자자는 기업경영이나 사업운영에 참여하지 않고 투자자금만 대면서 수익을 거두는 투자자를 말한다. 재무적 투자자는 일정 수익만 거두면 되기 때문에 기업의 장기적 비전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 보통 목표수익을 내면 해당기업을 재매각하는 것이 재무적 투자자들의 전략이다.
따라서 동양매직 입장에서 언제 또 다시 매각될지 모르는 재무적 투자자를 새 주인으로 맞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사업을 함께할 수 있는 전략적 투자자(SI)를 선호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현재 후보 중에서 전략적 투자자는 현대백화점이 유일하다. 동양매직 매각열쇠를 쥔 법원도 안정적 자금조달이 가능한 현대백화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다만 정 회장이 과연 이번에 인수전을 완주할지 미지수다. 정 회장은 지난해 매각 측에서 3천억 원이란 인수가격을 제시하자 부담을 느끼고 포기했다. 농협은행PE가 이미 3천억 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한 이상 이와 비슷한 수준까지 가격을 제시해야 승산이 있다.
정 회장이 기업은행 등 재무적 투자자와 손을 잡아 부담이 줄어든 만큼 과감하게 가격을 높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정 회장이 그동안 보수적 가격을 써냈던 만큼 다시 철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인수경쟁이 치열해지면 정 회장이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동양매직 인수우선협상대상자는 법원이 매각절차 등에 대한 법적 하자를 검토한 후 오는 12일 확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