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하면서 한진그룹의 ‘남매의 난’이 더욱 격화되고 있다.
‘재벌은 서로 싸워도 돈이 담장 밖으로 나가는 건 못 본다’란 말이 무색하게 조 전 부사장이 외부세력과 손잡고 한진그룹 ‘친정’을 겨냥한 모양새가 되면서 앞으로 진행될 양상에 시선이 몰린다.
◆ 조현아, KCGI와 ‘오월동주’로 한진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나
3일 업계에 따르면 조 전 부사장이 KCGI, 반도건설과 손을 잡았지만 이를 통해 떠안게 되는 부담에 비교하면 딱히 얻을 것이 적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강성부 KCGI 대표. |
세 주주는 공동으로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에 반대하고 전문경영인을 도입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주주제안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부세력’인 KCGI와 반도건설은 각각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권 개입 등 얻는 게 뚜렷하지만 조 전 부사장은 당장 손에 쥐는 실익보다는 집안에게 칼을 겨눴다는 부담이 크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을 중심으로 한 경영체제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일발역전’을 노리기 위해 대주주인 KCGI, 반도건설과 연합체를 꾸린 것이지만 당장 경영권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데다 추가 지분 매입여력도 다른 두 주주와 비교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조 회장 등 가족들을 향한 압박용 강경책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조 전 부사장이 애착을 지닌 호텔&레저 사업을 분리하는 수순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KCGI도 그동안 한진그룹에서 호텔&레저사업을 떼어내는 것을 원했던 만큼 중장기적으로 계열분리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등 조 회장을 제외한 가족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하면 오너일가 전체를 향해
조현아 전 부사장이 반기를 든 모양새가 된다는 점은 부담이다.
조 전 부사장이 지난해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과 대립각을 세웠던 KCGI와 손잡으면서 ‘
조원태체제’에 칼을 빼든 가장 큰 명분이었던 ‘아버지의 뜻’도 그 의미가 퇴색됐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명희 전 이사장과
조현민 전무 등 한진그룹 일가의 의중은 아직까지 불분명하지만
조현아 전 부사장의 본격적 움직임에도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시장은 대체로 이들의 지분을
조원태 회장의 우호지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과 KCGI, 반도건설 연합세력이 주주총회 표결에서
조원태 전 회장측에 이기더라도 사실상 근소한 차이로 이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후 다시 벌어질 판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주주총회만으로 최종승부가 결판나지 않는 만큼 일단 ‘승기’를 잡은 뒤 이후 이뤄질 오너일가 회의에서 ‘발언권’을 확보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순이다.
◆ 조현아의 승부수, 재벌그룹 오너일가의 ‘비극’과 ‘화해’ 갈림길
다만
조현아 전 부사장이 쏘아올린 한진그룹 ‘남매의 난’과 같은 경영권 분쟁은 재벌 역사에서 그 결과가 좋은 사례가 드물다는 점이 문제다.
▲ 조현민 한진칼 전무(왼쪽부터),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
분쟁 당사자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룹의 사세가 줄고 경영난을 겪는 등 각종 악재를 맞이했던 과거 사례가 부지기수다.
더구나
조현아 전 부사장이 단순 경영권 분쟁을 넘어 한진그룹 ‘친정’을 향해 빼든 칼이라면
조현아 전 부사장을 제외한 한진그룹 오너일가를 똘똘 뭉치게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오너일가 전체와 갈등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집안에서 사실상 '파문'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2005년 두산그룹 오너 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은 박용오 전 두산 회장이 두산그룹 오너일가 전체를 겨냥해 칼을 빼들었지만 그 결과가 비극으로 끝난 사례다.
박용성 당시 두산그룹 부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추대되자 박용오 전 회장은 이에 반발하며 두산산업개발을 계열분리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가족회의에서 거부되자 박용오 전 회장은 동생인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의 비자금 자료를 검찰에 넘기는 초강수를 뒀지만 결국 사실상 집안에서 파문당한 뒤 스스로 세상을 끊는 길을 선택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내심 바라는 ‘선례’는 현대그룹과 한화그룹에서 찾을 수 있다. 계열분리 등을 통해 경영권을 손에 쥐고 오너일가의 경영능력을 십분발휘한 사례다.
현대그룹 등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은 창업주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벌어진 형제 갈등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한진그룹 사례와 유사하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의 갈등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정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주며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현대기아차를 계열분리해 재계 2위로 키운
정몽구 회장의 실질적 승리로 끝났다.
오너일가가 계열분리를 통해 경영능력으로 사업을 성장궤도에 올린 사례라는 점에서 한진그룹의 주력사업인 항공보다는 호텔&레저사업에 애착을 지닌
조현아 전 부사장이 그려봄직한 그림이다.
다만 현대건설과 현대상선 등 주요계열사를 차지했던 정몽헌 회장은 결국 경영난으로 그룹은 크게 흔들렸고 이후 비자금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길을 선택해 씁쓸함을 남겼다.
한화그룹은 오너일가 사이에 경영권 분쟁을 벌였지만 화해로 마무리된 사례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의 두 아들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김호연 빙그레 회장은 1992년 계열분리 과정에서 한양유통 등 계열사를 놓고 4년 가까이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들은 1995년 어머니의 칠순잔치에서 극적으로 화해하며 갈등을 수습한 뒤 각각 한화그룹과 빙그레그룹을 맡아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최석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