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이 3월29일 20대 총선 공약으로 처음 제시했는데 돈을 찍어내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빌려 경기 부양을 하겠다는 것이다.
강 위원장이 이 공약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강봉균 개인플레이’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지만 4월7일 새누리당이 이를 이번 총선의 최우선 공약으로 삼겠다고 하면서 갑자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강 위원장은 7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중앙은행이 다른 선진국처럼 경제가 가라앉으면 일으키고 금융시장에 돈이 막힌 곳이 있으면 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한은을 통한 양적완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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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 |
새누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강력하게 비난했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는 9일 대전 박범계 후보(서구을) 지지유세 현장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자 새누리당이 또다시 양적완화를 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김 대표는 “대기업은 양적완화를 통해 마련한 자금을 실물경제에 투자하기보다 증권시장이나 부동산에 투자해 자산을 증가시킬 것”이라며 “한국판 양적완화는 우리사회의 양극화만 더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쪽은 양적완화를 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은 양극화만 더 심해질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 시중에 어느 정도의 돈이 돌고 있는지, 또 필요한 곳에 자금이 흘러들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보다 먼저 양적완화를 시행했던 미국의 경우를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11일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시중에 돈이 풀려도 돈이 안 오는 이른바 ‘돈맥경화’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은행은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해지면 경제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고 화폐발행을 늘렸지만 시중에 풀린 돈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은 통계를 보면 2월 말 현재 시중에 공급한 화폐에서 환수한 금액을 제외한 화폐발행잔액은 90조7942억원으로 사상 처음 90조원을 넘어섰다.
시중에 돈이 없어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돈의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지를 뜻하는 화폐 유통속도는 0.71에 그쳐 2002년 이후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이는 돈이 잘 돌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한은 통계에서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5만원권 환수율이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은 40.1% 수준이었는데 2014년 25.8%와 비교해 나아지긴 했지만 다른 화폐들이 80% 넘는 환수율을 보이는 것에 비해 여전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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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
이는 5만원권이 발행되면 유통 후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딘가에 저장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미래를 불안하게 여긴 기업들은 재투자에 나서지 않고 이익을 유보하고 있다. 2015년 말 현재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545조 원에 이른다. 2014년(507조 원)보다 40조 원 가까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가계들은 높은 가계부채 때문에 소비할 여력도 없다.
정리하면 시중에 풀린 돈의 상당 부분이 대기업과 일부 부유층의 계좌에 묶여 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새누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한국의 경기침체가 시중 유동성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동성을 계속 늘린다면 자산 거품과 붕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중에 크게 늘어난 돈이 투자와 소비로 흘러들어가도록 만드는 정책이다.
우리보다 앞서 양적완화를 시행했던 미국은 어땠을까.
김광기 경북대 교수(사회학)는 “미국의 경우 양적완화가 당초 목표인 경기부양에 실패했다”며 “양적완화로 풀린 막대한 자금은 월가의 대형금융기관과 대기업으로 쏟아져 들어가 이들의 배만 잔뜩 불리고 소득 상위계층과 서민들 간의 소득격차는 더욱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 양적완화가 경기부양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서민에겐 독이 됐다는 주장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며 “양적완화는 미국의 불평등 증대 및 양극화 심화의 주범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