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나보고 롯데그룹 회장을 그만두라 할 까봐 겁이 났다.”
재계 5위, 자산규모 110조 원의 롯데그룹을 이끄는
신동빈 회장이 9일 열린
박근혜 게이트 뇌물공여 혐의 재판에서 한 말이다.
▲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5월30일 오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이 한마디에 국내 대기업에서 경영권을 가진 이의 정치권력에 대한 두려움, 나아가 공포심까지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보인다.
사유재산제가 엄연한 나라에서 대기업 총수라는 자리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내려가고 말고 할 자리일 수 없다. 지분이 있는 만큼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 당연한 자리다. 대통령 권력 앞에 위기감을 느껴야 할 것도, 그럴 필요도 물론 없다.
그럼에도 신 회장이 박 전 대통령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은 신 회장 개인의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정치권력과 기업 사이 정경유착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기업이 크려면 혹은 생존하려면 정치권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권력의 힘으로 기업이 무너지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검찰은
신동빈 회장의 뇌물공여 사건을 정경유착의 전형이라고 보고 있다.
기업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경제적 이익을 대가로 기업의 현안을 해결해 주는 은밀한 거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경유착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겁이 났다.” “나와 롯데그룹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신동빈 회장은 전날 열린 공판에서 여러 차례 일관되게 진술했다. 그가 한국 롯데그룹에 처음 몸 담았던 당시 롯데케미칼(호남석유화학)이 쓰던 건물이 국제빌딩이라며 과거 국제그룹의 사례까지 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재계 순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국제그룹은 전두환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와 함께 공중분해된 것으로 알려진다. 부실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다른 기업보다 정치자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정권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도 나왔다.
최고 권력자가 달라는 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느냐는 신 회장의 말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
롯데그룹뿐만 아니라 국내 어느 대기업이 정경유착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부가 결정한 정책에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따라가야 했으며 지난 정권 때 불거진 미르나 K스포츠 외에도 ‘준조세’ 성격의 지원금을 강제하는 등 비정상적 정경유착 사태가 거의 매번 되풀이됐다.
2016년 12월 당시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 출석한 재벌 총수들은 정부의 결정을 기업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증언했다.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은 “기업 입장에서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도 “청와대 요청을 기업이 거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기업이 스스로 피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볼멘소리를 하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크든 작든 돈을 내고 그 대가로 정권의 비호 속에 여러 특혜를 누리며 성장하며 ‘원죄’를 쌓은 것도 대기업 스스로이기 때문이다.
결국 끊는 것도 이들 손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박근혜 게이트는 정격유착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로 볼 수 있다.
상처는 곪아서야 터진다. 터진 상처에 돋는 새 살은 과거와 달라야 한다. 정치권력을 향한 두려움을 막는 길은 결국 투명경영 밖에 없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