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조3176억 원과 9억7천만 원.
현대중공업이 선박용 피스톤 하청회사의 기술을 탈취했던 2015년 매출과 이에 따른 공정거래위 과징금 액수다.
9억7천만 원은 하청회사의 기술 탈취와 관련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원청회사에 부과한 최대 과징금이기도 하다.
'역대급' 과징금에도 불구하고 조선업계 여론은 차갑다. 9억7천만 원의 과징금에 현대중공업이 눈이나 깜짝하겠느냐는 것이다.
일부 누리꾼들은 솜방망이 처벌이 대기업들의 하도급 불공정행위를 부추기고 있다며 “대기업 하기 좋은 나라다”는 자조 섞인 댓글을 달기도 했다.
국내 조선업은 원청에 해당하는 조선사들이 사내하청까지 두고 있을 만큼 하청 의존도가 높다. 그런데도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조선3사의 하도급 불공정행위는 업계 관행처럼 여겨질 정도로 빈번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 사이 현대중공업은 207개 사내하청회사에 선박과 해양플랜트 제조작업을 4만8529건 위탁하면서 계약서를 작업이 시작된 뒤에야 발급했다.
이 때문에 사내하청들은 현대중공업이 일방적으로 정한 대금을 받아들여야 하는 불리한 지위에 놓였다. 원청인 현대중공업에 이의를 제기할 힘도 없었다.
현대중공업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사내하청회사에 추가 공사를 1785건 위탁하면서 작업이 진행된 뒤에야 이 하청들의 제조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대금을 결정하기도 했다.
2015년 12월 사외하청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어 일괄적으로 단가를 10% 낮춰줄 것을 요구했고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적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압박한 사실도 있다.
현대중공업은 공정위가 하도급 불공정행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조사대상 부서의 컴퓨터 101대 및 하드디스크 273개를 교체하고 관련 자료들을 은닉했다.
공정위가 자료 은닉과 관련해 내린 시정조치는 법인에 과태료 1억 원, 소속 직원 2명에 과태료 2500만 원씩을 부과한 것에 그친다.
공정위의 과징금이나 시정조치, 고발 등 하도급법 위반행위의 처벌은 해당 법인에 벌점으로 누적된다. 누적 벌점에 따라 공공입찰 참여의 제한이나 영업정지를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사들은 행정소송으로 대응하며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현대중공업도 이번에 드러난 하청회사 기술 탈취의 건과 관련해 “공정위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입장과 차이가 있다”며 “공정위로부터 의결서를 받게 되면 검토 뒤 대응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조선업계 추산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의 누적 벌점은 이미 영업정지 기준에 해당하는 10점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현대중공업이 후속대응을 말할 만큼 하도급법은 유명무실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이 하청회사 기술을 탈취하려 했던 2014년과 2015년은 국내 조선업계에 악몽과도 같은 시기였다. 현대중공업도 2014년 영업손실 3조2740억 원, 2015년 영업손실 1조5849억 원을 냈다.
그러나 이런 적자가 하도급 불공정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이 시기 조선사들의 조 단위 적자는 무분별한 해양플랜트 수주에 따른 시행착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영진의 전략 실패였던 것이다.
현대중공업은 스스로 조선업에서 하청의 비중이 70%에 이른다고 말한다.
처벌이 약하다고 해서 조선사들이 하청을 착취해 손해를 보전하려는 기존 사업구조를 스스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하청회사들이 생존하기 어렵다. 조선업의 70%에 이르는 하청회사들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조선사일 수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이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현대중공업은 3월 하청회사들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직을 대표이사 직할의 동반성장실로 확대개편했다.
김숙현 현대중공업 동반성장실장은 7월 협력사 5곳을 방문해 이들의 고충과 건의사항을 들었으며 이런 간담회를 연말까지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움직임들이 보여주기식 간담회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후속조치로 이어져 현대중공업이 글로벌 1위 조선사로서 떳떳해지길 기대해본다.
한국 조선업이 살려면 원청과 하청이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계 최고 조선사인 현대중공업이 그 상생의 길을 터야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