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엘앤피코스메틱 권오섭의 '헤일 메리' 승부수
- 태양 에너지를 빨아먹는 외계 미생물. 지구는 빙하기에 빠지고 인류는 종말의 순간에 처한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인류는 성공 확률이 극히 희박한 우주선 한 대를 우주로 쏘아 올린다.그 우주선의 이름은 '헤일 메리호'.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군 SF 영화 '프로젝트 헤일 메리(Project Hail Mary)' 이야기다.원래 '헤일 메리(Hail Mary)'는 미식축구 용어다. 경기 종료 직전 패스 한 번으로 승부를 역전시키거나 끝내는 것을 말한다.링크드인 공동 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의 유명 투자자인 리드 호프만은 이 스포츠 용어를 경영학으로 가져와 이렇게 정의했다."비즈니스에서 헤일 메리는 전망이 불투명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낮은 성공률에 기대를 걸고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전술을 가리킨다."(리드 호프만 저 '마스터스 오브 스케일' 인용, 인플루엔셜)2009년 직원 3명과 함께 엘앤피코스메틱(L&P Cosmetic)을 세운 권오섭(67)이라는 기업인의 손에도 마지막 공 하나가 남아 있었다.앞선 두 번의 실패 속에서 "망해도 제대로 망해야 한다"며 신용을 지켜냈지만, 그의 비즈니스 전광판은 사실상 '경기 종료'를 가리키고 있었다.대기업들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경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직감한 권오섭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조준한 곳은 화려한 경기장 중심이 아닌, 모두가 공짜 사은품이라며 거들떠보지 않던 '변두리', 바로 마스크팩 시장이었다.당시 권오섭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틈새 시장의 잠재력을 파고들었다. 고기능성 마스크팩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창출해 내기 위해 헤일 메리 패스를 던졌던 것이다. 이 마지막 승부수 덕에 마스크팩 '메디힐'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권오섭의 헤일 메리 패스는 완벽한 작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거둔 벼랑 끝 서바이벌의 산물이었다.권오섭 회장의 기부로 2020년 들어선 고려대 메디힐 지구환경관(지하 1층, 지상 7층) 건물. <이재우>◆ 실패를 견딘 기업가, 지구 연구 건물을 짓다일반인들에겐 비교적 덜 알려진 권오섭 회장. 엘앤피코스메틱을 이끌고 있는 그를 독자들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최근 고려대 이과대학 캠퍼스를 찾았다.교정 한편에 우뚝 선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권 회장이 2016년 메디힐 신화로 거둔 결실(120억 원)을 내놓아 4년 뒤인 2020년 들어선 메디힐 지구환경관(지하 1층, 지상 7층)이다.사실, 권오섭 회장은 이 학교 지질학과(현 지구환경과학과) 출신이다. 영화 속 인류가 기후 종말을 막기 위해 헤일 메리호를 쏘아 올렸듯, 비즈니스 전장에서 살아남은 한 기업가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구의 기후 위기를 연구할 거대한 기지를 세운 셈이다.메디힐 지구환경관 1층 로비 벽에는 권오섭 회장의 얼굴과 함께 '꿈을 함께 하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라는 다짐이 적힌 명판(名板)이 묵직하게 붙어 있다.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보니 그의 아내이자 최대주주인 박선희 씨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권오섭·박선희 Floor' 명판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첫 사업 실패하고 아내의 차까지 팔아야 했던 처절함이 명판에 녹아 있는 듯했다. 명판 아래 박혀 있는 문장은 권오섭 회장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꿈꾸는 것 자체를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이 어록은 낮은 성공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매달린 집요한 실행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장학재단, 의료센터 등 권오섭의 고려대 누적 기부는 300억 원에 가깝다.)고려대 메디힐 지구환경관 복도에 걸린 '권오섭·박선희 Floor' 명판. 박선희는 엘앤피코스메틱의 최대주주이자 권오섭 회장의 부인이다. <이재우>◆ 변두리를 정밀 타격한 '핀셋 마케팅'권오섭은 사은품에 불과했던 마스크팩의 역학 관계를 재정의한 경영자다. 과거의 마스크팩은 화장품 세트를 사면 끼워주는 사은품, 즉 주면 쓰고 없으면 그만인 '저관여(Low-involvement) 소모품'에 불과했다.하지만 권오섭은 그런 마스크팩에 메디컬의 아우라를 입혔다. 유명 피부과와 협업하고, 링거와 주사기라는 시각적 플롯을 디자인에 도입했다. 제품이 먼저 효능을 말하게 만든 것이다.메디힐은 '피부 관리를 원하는 여성'이라는 모호한 대중을 노리지 않았다. 대신 '내일 중요한 면접이 있는 취준생', '장거리 비행으로 피부가 뒤집어진 여행객' 등 아주 구체적이고 절박한 순간들을 핀셋으로 집어 올렸다.권오섭은 효과만 확실하다면 사람들은 매일 밤 다시 그 팩을 찾는다는 사실을 읽어냈다. 이로써 변두리의 틈새(니치) 시장이 주류(매스) 시장을 흔드는 확장의 드라마가 완성됐다.엘앤피코스메틱의 주력인 메디힐 마스크팩. 링거와 주사기라는 시각적 플롯을 디자인에 도입해 차별화했다. <이재우>◆ 백화점 대신 올리브영, 권오섭의 유통 역습권오섭은 유통 채널에 변화를 준 이른바 '길목을 지키는 쿼터백'이었다. 니치 마켓이 메인스트림이 되려면 유통의 영토가 바뀌어야 한다.권오섭은 기존 대기업이 장악한 백화점이나 방문판매라는 강고한 성벽을 정면 돌파하지 않았다. 대신 당시 태동하며 급성장하던 올리브영과 약국, 그리고 면세점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선점했다.이 우회 전략은 시대적 타이밍과 맞물렸다. 2010년대 중반 중국 시장을 중심으로 K-뷰티 열풍이 불어닥쳤을 때, 올리브영과 면세점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메디힐은 가장 빠르게 그 낙수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이 극적인 돌파력의 바탕에는 권오섭 회장의 대표 어록이 자리 잡고 있다. 가업의 뿌리인 어머니 유임순 여사로부터 배운 경영철학이기도 했다. (고려대 메디힐 지구환경관에는 '유임순 홀'이 있다.)"고객이 만족하는 화장품은 망하지 않는다. 명품은 비싼 게 아니라 잘 팔리는 제품이다."권 회장은 메디힐 성공 이후에도 새로운 성장 축을 찾아 움직였다. 성분 중심의 클린뷰티 브랜드 '마녀공장'의 지분을 인수해 상장 후 매각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또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면서 핵심 브랜드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하지만 메디힐이라는 단 하나의 성공 브랜드만으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 역시 그를 압박하고 있다.권 회장은 이를 넘어서기 위해 글로벌 차원의 마케팅을 감행하기도 했다. 메디힐 골프단을 창설하고 LPGA 메디힐 챔피언십을 개최하며 스포츠 시장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는 영토를 세계로 넓히기 위해 그가 던진 또 하나의 롱패스였다.위기는 늘 정면에서 오고, 돌파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열리는 법이다. 권오섭의 도전을 복기해 보면, 그는 모두가 외면한 변두리에서 시작했다.누구도 마스크팩으로 세계를 흔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권오섭이 절망적인 순간 롱패스를 던지기 전까지는. 이재우 경영어록서 '일언천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