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라면업계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가격 인하 ‘압박’ 발언으로 시작된 라면값 논란이 정부의 바람대로 마무리 돼가는 모양새다.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방송에 출연해 한 발언에서 시작된 라면값 인하 논란에 라면업계가 백기를 들었다.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 참석해 회의 의제에 대해 발언하는 추 부총리. <연합뉴스> |
라면업계 1위인 농심이 먼저 신라면과 새우깡 출고 가격을 각각 4.5%, 6.9% 인하하겠다며 나섰다. 뒤이어 삼양식품도 12개 라면 가격을 평균 4.7%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뚜기도 7월1일부터 15개 제품 가격을 평균 5% 내린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라면값 인하가 반가운 소식이다. 라면은 서민 먹거리를 대표하는 품목인 만큼 정부 입장에서 고물가, 특히 서민 체감물가 관리에 팔을 걷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가격을 통제하는 상황이 달가울리 없다. 이는 기업이 가격을 내리는 것은 수익성 측면만 놓고 봐도 기분좋을리 없지 않겠냐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친기업 정부’가 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자유경제’를 강조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임을 자처하며 기업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외교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면 기업들은 ‘우리 앞으로 경영활동하기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면값, 밀가루값 뿐만 아니라 금융, 통신, 정유, 주류, 공공요금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가격 개입이 이뤄지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던 자유경제가 과연 어떤 모습인건지 의아할 수도 있다.
정부의 가격 개입 자체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철학에 따라 가격 개입이 이뤄질 수도 있다.
정부가 일관된 철학과 기조를 가지고 가격에 개입한다면 소비자와 기업에게 ‘예측가능성’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정부 움직임에서는 ‘일관된 철학’이나 ‘예측가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기업들에서는 가격에 대한 정부 개입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라면값 인하에 대한 추 부총리 발언이 나왔을 때 라면업계들은 한 목소리로 “밀 가격이 하락한 것은 맞지만 밀 가격이 밀가루 가격에 반영되는 데는 6~9개월이 걸리고 밀가루 가격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정부는 제분업체들을 불러들였다.
26일 농림식품축산부는 제분업체 10여 곳을 소집해 밀가루 가격 인하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밀가루 가격이 높아 라면값 내리기가 쉽지 않다고 하자 이번에는 제분업계에 밀가루 가격을 내리라고 압박한 것이다.
라면값은 결국 인하됐지만 정부와 업계가 4개월 넘게 기싸움을 하고 있는 분야도 있다.
▲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후보 시절부터 ‘친기업 정부’가 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자유경제를 강조한 바 있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 공식리셉션에 참석해 발언하는 윤 대통령. <대통령실> |
바로 정유업계다.
정부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유류 도매 가격을 공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시행령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경유 등의 가격을 지역별로 구분해 공개하면 정유사 간 경쟁을 촉진해 석유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은 올해 2월 진행된 국무총리실 산하 규재개혁위원회의에서 첫 심의 이후 테이블에 오르지 못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개정안은 2009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추진된 바 있다. 하지만 영업비밀 침해라는 정유업계 반발 때문에 2011년 예비심사에서 철회됐다.
공교롭게도 라면값을 마지막으로 인하한 것도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이른바 ‘MB물가 품목’을 지정해 매일 가격을 관리한 적이 있다. MB물가 품목은 서민생활과 밀접한 52개 품목으로 구성됐다.
단기적으로는 물가가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MB물가 상승률이 다른 품목들보다 더 높은 부작용을 낳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MB물가 품목들의 5년 동안 물가 상승률은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1.6배 높았다.
윤석열 정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로 보인다.
가격에 대한 정부 개입은 양날의 검이다. 장기적으로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부가 가격 통제에 나선다면 몇 년 뒤에는 국민들이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과 가격 인하를 압박하는 정부 사이에 서 있는 기업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개입이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개입하면서 단기적 ‘민심잡기’가 아닌 장기적으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방안을 고민할 때다. 윤인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