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재정운영 구상이 흔들리고 있다. '재정준칙'을 통해 정부 곳간을 지키는 동시에 예비타당성조사 기준을 낮춰 재정 지출의 유연성을 확보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재정준칙 마련을 위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도 포퓰리즘 지적에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월17일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질의에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17일 이날로 예정됐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고 처리를 연기했다. 앞서 12일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으나 제동이 걸렸다.
여야가 총선을 1년 앞두고 선거에 유리한 지역 사업 등을 유치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낮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지자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완화는 물가 상승과 사업 원가 상승을 고려한 것이라고 하지만 재정건전성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바람직한 것인지 국민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민생이 몹시 어려운 현 상황에서 국민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 후 법안을 더 신중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사회간접자본(SOC)·국가연구개발(R&D)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대상 기준 금액을 현행 '총사업비 500억 원·국가재정지원 규모 300억 원 이상'에서 '총사업비 1천억 원·국가재정지원 규모 500억 원 이상'으로 상향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다.
예비타당성조사 기준은 제도가 도입된 1999년 이후 24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기획재정부는 그동안 국가 재정 낭비 가능성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지만 이번 정부 들어 경제활성화를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기준 완화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물가상승률 등 경제상황을 비롯해 국가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을 완화해 대형 사업을 빠르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6월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서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개편 방향을 제시한 데 이어 같은해 9월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개편 방안을 확정했다. 이때 확정된 개편안의 핵심 내용이 지난 1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의결된 국가재정법 개정안이다.
추경호 부총리는 지난해 9월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현행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경직적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며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재정의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는 한편 예비타당성조사 신속·유연·투명성을 높이겠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국가재정법 개정안 처리가 미뤄지기는 했어도 지난해 12월 여야가 해당 법안을 잠정 합의해 놓은 만큼 추후 통과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반면 나라살림이 점점 빠듯해지는데 국가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추진하는 재정준칙 법제화는 기약이 없어 추 부총리로서 답답한 상황이다.
재정건전론자로 알려진 추 부총리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상향과 재정준칙을 함께 처리하려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추 부총리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경제 규모의 변화가 있으므로 예비타당성 조사 기준 금액을 상향조정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일면 있지만 과도하게 하다 보면 재정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한쪽에서 있을 수 있다"며 "이런 측면에서 예비타당성 기준 상향과 재정준칙을 (국회에서) 동시에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기획재정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재정준칙 논의는 없었다. 앞서 문재인 정부가 2020년 10월 재정준칙 법제화를 발표한 이후 2년6개월째 표류 중이다.
추 부총리는 11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전 세계 105개국에 재정준칙이 있는 것을 거론하며 "국회에서 저렇게 표류시키고 결론을 못 내주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가 추진하는 재정준칙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로 유지하고 국가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 60%를 넘으면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 2%까지 낮추는 것이다.
관리재정수지는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성 기금을 제외한 지표로 정부의 실제 살림살이를 가늠할 수 있다.
2월말 누계 관리재정수지는 30조9천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적자폭이 10조9천억 원 커졌다. 기획재정부가 올해 예산에서 추산한 관리재정수지 적자 전망치 58조2천억 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최근 세수 상황은 나빠지는 흐름을 보이면서 세수 결손 우려까지 나온다. 올해 걷어야 할 세금은 400조5천억 원으로 지난해 395조9천억 원(결산 기준)보다 늘었는데 2월까지 국세수입은 54조2천억 원으로 1년 전보다 15조7천억 원 줄었다. 김남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