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재 기자 piekielny@businesspost.co.kr2023-03-13 16: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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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포스트] “제2의 베어스턴스를 보는 것 같다.”
올해 초 출간한 ‘경제파국으로 치닫는 금융위기’ 책을 통해 글로벌 경제위기를 경고한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은 13일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미국의 현재 상황을 이렇게 바라봤다.
▲ 미국 실리콘밸리뱅크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가상화폐은행 실버게이트의 청산에 이어 자산 2090억 달러(약 272조 원) 규모의 미국 16대 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직전 파산한 베어스턴스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강타한 것은 9월 미국 4대 투자은행(IB) 리만브라더스가 무너진 뒤지만 전조가 된 것은 3월 또 다른 투자은행이었던 베어스턴스의 파산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은 베어스턴스 파산을 찻잔 속 태풍으로 치부하며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신뢰했고 이는 결국 6개월 뒤 리만브라더스 파산과 미국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졌다.
현재 글로벌 경제상황은 올해 초 금융위기를 예측한 최 소장의 책이 나온 뒤에도 나날이 악화할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2008년 때와 마찬가지로 현재 상황을 통제 가능하다고 보고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신뢰하고 있다.
당장 이날만 보더라도 미국 금융당국이 실리콘밸리은행의 예금을 모두 보호해주기로 하면서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상승 마감하며 지난 주말 미국의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으로 놀란 심리가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세계 금융위기를 연구해온 최 소장에 따르면 현재 세계 경제상황은 ‘광기 패닉 붕괴’의 과정을 거치는 금융위기의 특성상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다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적 선택만 있을 뿐이다.
최 소장은 “지금 상황은 2008년 베어스턴스를 시작으로 줄줄이 투자은행이 무너진 미국발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며 “금융당국은 이번 사태가 금융시스템 위기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반대로 보면 그만큼 시스템 위기로 갈 수 있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최근의 미국의 경기상황을 2008년 금융위기에 빗댄 것은 최 소장만이 아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지난해 10월 미국, 영국 등 글로벌 주요 중앙은행이 물가상승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신뢰가 깨지면 주요 금융기관이 파산하는 베어스턴스 사태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현재까지는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이 베어스턴스 파산 때와 세부적으로 내용이 크게 다른 만큼 심각한 금융위기로 전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전체 자산 규모가 베어스턴스보다 크게 적고 고객이 스타트업이라는 특정산업에 한정돼 있다는 점, 미흡한 자산배분 전략으로 대규모 채권 손실을 봤다는 점, 미국 대형 은행들은 여전히 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점 등이 주요 근거로 꼽힌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2008년 때만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도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2008년 월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금융위기와 달리 지금은 코로나19 이후 고물가를 유발한 유동성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뤄진 기준금리 상승이 미국 주요 상업은행의 파산으로 이어진 만큼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국채가격 하락 위험성은 모든 은행이 지닌 만큼 앞으로 기준금리 인상 기조가 이어질 경우 다른 은행들도 건전성에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예금 인출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을 앞당겼다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분석도 뱅크런을 동반한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여겨진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2일(현지시각) ‘스마트폰 뱅크런으로 비운을 맞은 SVB’ 기사에서 실리콘밸리은행이 건전성 이슈가 불거진 뒤 이틀도 채 안 돼 파산한 배경으로 스마트폰으로 예금을 손쉽게 인출할 수 있는 상황을 꼽았다.
경제학에서는 뱅크런을 가득 차 있는 어두운 극장 안에서 누군가 ‘불이야’를 외치는 것에 비유할 정도로 극도의 혼란 상태로 바라본다. 이처럼 스마트폰을 이용한 실시간 예금 인출이 향후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뱅크런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소장은 “실리콘밸리은행 자산 규모가 2008년 무너진 투자은행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은 만큼 이번 사태가 심각한 금융위기로 직결되진 않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향후 달러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면 트리거로 작용해 글로벌 금융자본들이 미국을 이탈하면서 신용파괴 원리가 급격하게 작동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결국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기조가 안정적으로 끝나기까지 금융위기를 향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셈인데 한국 금융당국도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고 대처하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전 주재한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으로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확산하고 있다”며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SVB 파산요인, 사태 진행 추이, 미국 당국의 대처, 국내 금융시장 및 실물경제에 대한 영향을 면밀히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