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기자 hyunjung@businesspost.co.kr2018-07-17 17: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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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거래소가 북한 경제개방에 따른 '북한 증권거래소'의 설립을 연구하며 베트남 등에서 증권거래소가 만들어졌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가 경제개방을 실시한 뒤 증권거래소를 설립할 때 주식거래 등의 개념을 시장에 교육하고 관련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 한국거래소.<연합뉴스>
또 증시 상장을 위해서 국영화 기업들을 민영화로 전환하는 작업도 사전에 이뤄놓아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증권거래소의 설치는 가계·기업·정부 등 경제주체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경제개혁의 마지막 수순에야 비로소 이뤄졌던 만큼 북한에 증권거래소가 개설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오랜 시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증권거래소 설립을 돕는 산파 역할을 해왔다.
정지원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동안 한국거래소가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증권거래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면서 이와 관련한 실무연구반을 꾸릴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베트남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혁의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나라로 꼽히기도 한 만큼 북한이 자본시장을 열 때 베트남의 개방 과정을 참고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거래소의 '베트남 증권거래소 설립 사업'은 1995년 베트남 정부가 한국 정부에 베트남 증권거래소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데서 시작된다.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돈을 모아서 기업의 성장 가능성에 투자를 한다’는 개념을 전혀 알지 못했을 뿐더러 현지기업들 역시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면 경영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국거래소는 베트남 정부가 뽑은 ‘증시 설립 준비요원’들을 대상으로 교육부터 시작했다.
한국거래소는 베트남 재무부와 공동주관해 특별연수를 열고 ‘시장경제의 개념’과 ‘증권시장의 기초이론’, ‘증권시장의 규제체제’ 등을 강의했다. 또 국내 증권사들의 전문인력을 베트남에 파견해 베트남 대학에 증권 강좌도 열었다.
기술 자문에 이어 거래소 설립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와 운영장비 등도 공급하면서 한국식 전산 시스템을 베트남에 구축했다.
1998년에는 ‘베트남 모의 증권시장’이 개장했다. 한국거래소는 베트남 증권시장의 운용요원들이 '모의 증권시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실무경험을 쌓도록 했다.
이런 작업들이 추진되는 동안 베트남 정부는 거래소에 올릴 기업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국영기업을 민영기업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다. 베트남 정부는 5천여 개의 국영기업 가운데 440여 개의 기업을 선정해 경영자와 근로자들에게 주식을 이전해 놓았다.
마침내 2000년 7월20일 베트남의 '호치민 거래소'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태국에서 들여온 메인 컴퓨터가 문제를 일으켜 6개월가량 개장이 지연되는 등 크고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민영화된 기업은 440여개였고 그 가운데 상장 적격기업 수는 40~50개에 이르렀지만 달랑 2곳만이 상장된 채 장이 열렸다.
기업들 사이에 증권시장의 불확실성을 향한 의구심이 컸었고 기업 정보 유출을 꺼리는 분위기도 널리 퍼져있던 탓에 베트남 증시가 활성화되기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거래소가 문을 열기 보름 전부터 시작해 개장 후 몇 개월 동안은 베트남에 암시장이 성행하기도 했다.
베트남 증권거래소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래소에서 주식을 사고팔지 않고 흑자가 기대되는 기업들의 주식을 지하시장에서 거래했다.
한국거래소는 베트남이 증권거래소를 세우는 일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당시 불확실한 곳에 국부를 유출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한국거래소가 이후 많은 나라들에 증권 거래 시스템을 수출할 수 있게 된 발판이 마련된 만큼 무의미한 작업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거래소가 베트남 증권거래소 설립사업에 쓴 돈은 180만 달러에 이른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호치민 증권거래소를 만드는 데 140만 달러를 지원했고 2000년부터 2005년까지 40만 달러를 추가로 지원해 '하노이 증권거래소'도 지어줬다. 하노이 증권거래소는 한국의 코스닥시장 개념이다.
한국거래소는 베트남 이후 라오스, 캄보디아 등 다른 경제개방 국가에도 증권거래소를 세웠다. 북한의 증권거래소 설립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이유다.
한국거래소는 2005년 주식회사로 전환한 뒤 해외 지원 방식을 ‘유상지원’으로 바꿨다.
한국거래소는 캄보디아 증권거래소의 설립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캄보디아 증권거래소의 지분 45%를 확보해 캄보디아 경제 성장에 따른 과실의 일정 부분을 배당받고 있다. 라오스 증권거래소 지분도 49%를 보유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증권거래소 설치는 경제 개방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북한이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는 날은 개방이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한국거래소가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에서 꾸준히 쌓은 경험과 연구노력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북한 증권거래소 설립 때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은 1985년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 정책을 발표한 뒤 10년이 지난 1996년에 이르러서야 증권거래소을 설립하자는 말이 나왔다. 중국도 개방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증권거래소를 설치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