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정치권의 반응을 종합하면 이재명 정부의 내각 구성에 있어 기업인 전진 배치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전 정부는 정권 초에 법조인, 대학 교수을 중용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재명 대통령은 이런 관행을 과감히 깨뜨렸기 때문이다.
기업인 출신 장관이 없지는 않았지만 '예외적'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번엔 기업인 출신 인사 3명이 한꺼번에 장관급으로 지명 또는 임명됐다.
이 대통령은 전날인 23일 11개 부처의 장관을 지명하고 국무조정실장을 임명했다.
송미령 농림축산부 장관은 진보·보수 진영을 넘어 유임됐고, 1961년 5·16 군사 구테타 이후 첫 민간인 출신 국방부 장관 후보자도 나왔다. 민주노총위원장 출신으로 현역 기관사가 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발탁됐다.
이와 함께 정치권과 경제계의 눈길을 사로 잡은 대목은 이날 지명 또는 임명된 12명 가운데 기업인 출신이 25%나 된다는 점이다.
그동안 정부의 전문가 인력 풀에는 법조인이 많았는데 이번 정부들어 기업인들을 전진배치한 것이다. 실제 이날 인선에서 법조인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일각에서는 사회의 전문가 인력 풀의 성격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풀이까지 내놓는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다른 역량이 더 중요해졌다. 그것은 타협하고 조정하는 역량"이라며 "이런 방향으로 가려면 훨씬 더 앞으로 가고 있는 민간 부문 역량들을 정권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타협의 문화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들 기업인 출신 장관 지명자들은 모두 인공지능(AI) 산업 발전이라는 명확한 '임무'를 이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모두 '대기업 출신 IT 전문가'이다. 이들은 앞서 임명된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 수석과 함께 이 대통령의 'AI 3대 강국 도약' 공약 수행에 앞장서게 됐다.
AI 업계 전문가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AI 영역에서 민간과 공공은 누적된 경험이 차원이 다르다"며 "민간에선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의 목숨을 걸고 AI 기술 개발에 매달려 왔다"고 말했다.
2023년 7월 LG경영개발원 산하에 신설된 글로벌전략센터의 초대 센터장을 맡아 각 계열사의 통상 전략과 공급망 리스크 대응을 총괄했다. 글로벌전략센터는 미래 연구개발(R&D)보다 현재 이슈 대응에 특화된 조직으로, 각국 규제·공급망 리스크·외교 전략에 실시간 대응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대통령은 윤창렬 실장의 통상 대응 경험과 함께 그룹 계열사의 각종 이슈에 즉각 대응하는 역량을 높이 산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국무조정실장은 보통 정치인 또는 관료 출신의 몫이었다.
요컨대 이번 기업 출신 인사의 전진 배치는 '시대 변화'와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만난 결과인 셈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 정부와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노무현 정부 이후 임명된 239명의 국무위원 가운데 기업인 출신은 4명으로 1.7%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박근혜 정부의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문재인 정부의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 윤석열 정부의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이 전부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조국조국혁신당 대표가 2024년 4월25일 서울 모처에서 만찬 회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정부는 정권 출범과 함께 어김없이 참신한 인재 영입을 내세웠고 그 결과는 대부분이 교수 출신(58명)이었다. 해당 교수들이 새로운 정부의 이념을 설계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조국 법무부 장관 등도 이런 사례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번 이재명 정부의 장관 후보자 발표에는 교수와 법조인 출신을 찾을 수 없다. 기업인 외에 다수의 정치인이 전진배치됐다. 정치인의 경우 이전에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이제는 꾸준한 국회 상임위 활동을 바탕으로 추진력과 함께 전문성까지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23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장관급 인사를 발표하며 "실용과 효능감을 강조하는 대통령의 철학에 따라 성과를 만들어 가는 행정부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대통령 인사에서 네이버(하정우 수석·한성숙 후보자)와 LG그룹(배경훈 후보자·윤창렬 국무조정실장) 출신이 많다는 점도 경제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삼성그룹과 SK그룹 출신은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네이버와 LG그룹이 그동안 AI 산업에 강한 열의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업계 일각에서 나온다. 두 회사가 대기업·빅테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투자하고 실적도 좋다는 것이다.
LG엑사원(EXAONE)은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소가 올해 낸 'AI 인덱스 보고서 2025'에 유일하게 포함된 국내 AI 모델이다. 모델과 데이터셋 같은 머신러닝 라이브러리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의 인공지능 플랫폼 중 하나인 허깅페이스(huggingface)에서 한국어 모델 가운데 최다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다. 배경훈 후보자는 LG AI 연구원장으로 '엑사원' 개발을 주도했다.
한 AI 엔지니어는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카카오, SK, KT, 삼성, LG 등은 모두 앞다퉈 AI를 다루고 있다"면서도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로컬에서 내려받아서 실행할 수 있는 거대언어모델(LLM) 가운데 LG엑사원이 가장 좋다는 평가가 많다. 그리고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 엑스(HyperCLOVA X)라는 한국에 특화된 생성형 AI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네이버는 서비스의 강자, LG AI 리서치는 기초 연구의 강자"라고 덧붙였다.
이들이 대기업 출신이기 때문에 혹시 대기업 위주 정책을 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다만 노동계에서는 아직은 지켜보자는 분위기인 모양새다. 김영훈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이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23일 성명을 통해 "정부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노정교섭을 제도화하고 안착시켜야 한다"며 "김영훈 후보자가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깊이 인식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부 장관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기대한다"라고 했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