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섭 기자 jskim28@businesspost.co.kr2025-05-02 08:57:25
확대축소
공유하기
▲ 유영상 SK텔레콤 대표이사가 4월3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에서 열린 방송통신 분야 청문회에서 유심 해킹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지난 4월30일 오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회의장.
의원들이 '유심 해킹' 사태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증인으로 부른 유영상 SK텔레콤 대표를 상대로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요구를 쏟아냈다.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해킹 사태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그 이유는 SK텔레콤의 대응이 미흡하고, SK텔레콤에 대한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라며 "불안해하는 가입자들이 번호이동을 할 수 있게 위약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은 "고객(가입자)은 번호이동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귀책 사유는 사업자에게 있는데, 고생은 피해자인 국민이 한다. 그렇다면 번호이동 고객에게 위약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보상을 해줘야 하는 상황 아니냐"고 따졌다.
하지만 유 대표는 끝까지 확답을 하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만 했다.
과방위는 '최태원 SK 회장 증인 소환 의결' 카드까지 쓰며 유 대표의 확답을 압박했으나 소용없었다.
위약금이란 통신서비스 가입자가 약정기간을 채우지 않고 중도 해지하는 경우, 일정기간 가입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그동안 깎아줬던 요금을 토해내게 하는 것이다. 이동통신과 초고속인터넷 등의 요금제에 도입돼 있다. 단말기 할부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 최태원 SK 회장.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4월30일 '유심 해킹 피해자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를 요구하겠다며 최 회장을 증인으로 소환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통신품질 불량을 이유로 중도 해지를 할 때는 위약금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SK텔레콤 가입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을 통신품질 불량으로 볼 수 있느냐다.
SK텔레콤의 이용약관(제43조)에도 '회사의 귀책 사유로 인해 해지할 경우'에는 위약금 납무 의무가 면제된다고 규정돼 있다.
SK텔레콤 가입자들은 지금 상황을 통신품질 불량보다 더 나쁜 상태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미 SK텔레콤 책임으로 자신의 유심정보가 유출되는 피해를 당했고, 그로 인해 복제폰과 보이스피싱 같은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다.
금융사와 증권사 등이 휴대전화를 통한 본인인증을 중단하는 등 각종 간편 서비스 이용 제약도 잇따르고 있다.
SK텔레콤이 '유심보호서비스 가입 권유'와 '유심 무상 교체' 등으로 대응하고 있으나, 가입자 쪽에서 보면 설상가상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유심보호서비스에 가입하면 국제로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국외 여행지나 출장지서 음성통화는 물론 카카오톡 등도 이용할 수 없다. 휴대전화가 '반쪽짜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유심 교체 역시 재고 부족으로 언제나 차례가 올 지 막연하다. SK텔레콤 가입자가 2300만(SK텔레콤 통신망을 쓰는 알뜰폰 가입자까지 포함하면 2500만) 명을 넘는데, 이 업체가 조달 가능한 유심은 월 500만 개를 넘지 않는다.
SK텔레콤 가입자 쪽에서 보면, '피난'(다른 사업자로 번호이동) 밖에 길이 없다. 하지만 많게는 수십만 원에 이르는 위약금이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통신 사업자들은 지금 상황을 통신품질 불량으로 보지 않는다. 법의 통신품질 문구를 '네트워크 품질'로 국한시켜 좁게 해석한다. 사업자들의 해석대로라면, 휴대전화를 통한 본인인증 같은 간편 서비스는 물론 국제로밍 서비스까지도 '부가서비스'로 간주돼 통신품질 범주에서 빠진다. SK텔레콤도 마찬가지다.
한 이동통신사 임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이와 관련해 "음성통화, 문자메시지 송수신, 데이터 송수신 등 통신 기능의 품질에는 문제가 없지 않냐. 해킹에 따른 불안감, 부가서비스 이용 불편, 간편서비스 등 콘텐츠 쪽 기능까지 통신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유 대표도 과방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법무법인 세 곳에 법률 검토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통신품질 불량이 아니라고 에둘러 항변한 셈이다.
거의 모든 요금제가 일정기간 약정을 조건으로 요금을 깎아주는 형태로 설계돼 위약금 면제 요구 수용 시 재정적 부담이 크다는 점도, SK텔레콤이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를 선뜻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통신업체 관계자는 "가입자당 적게는 몇만원에서 많게는 수십만원까지 위약금이 걸려있다. SK텔레콤 쪽에서 보면, 위약금을 면제하면 번호이동을 통한 가입자 이탈이 더욱 가속화하는데다 위약금 면제에 따른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며 "(위약금 면제 여부는) 법적 해석은 물론이고 정무적 판단까지 해야 하는,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유심 해킹' 사건 이후 2차 피해 불안감을 느껴 번호이동을 통해 이탈한 SK텔레콤 가입자가 이미 1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이들에게서 발생한 위약금만도 이미 수십억원에 이르고, 100만 명이 넘으면 수백억원으로 커질 수 있다. 가입자 이탈 가속에 따른 요금 수입 감소까지 더하면 SK텔레콤의 부담은 말 그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말했다.
▲ SK텔레콤 표지석. <비즈니스포스트>
나쁜 선례를 남긴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다른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해킹 같은 침해 사고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텐데, 그 때마다 위약금 면제 요구가 나올 것 아니냐"고 말했다.
업계에선 "SK텔레콤이 번호이동 이탈자들의 위약금을 면제하기로 하는 경우, 주주들로부터 배임 소송을 당하고, 경쟁 사업자들로부터는 나쁜 선례를 남긴 데 대한 원성을 듣는 상황도 예상해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