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기자 swaggy@businesspost.co.kr2024-06-0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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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023년 12월29일 국회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예방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비즈니스포스트] ‘차떼기 사건’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구당이 부활할 가능성이 나온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여야의 주요 인사들이 거론한데 이어 관련 법안도 잇달의 발의되고 있어 지구당 부활이 현실화할 지를 놓고 관심이 모인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22대 국회 개원 초반부터 지구당 부활과 관련한 법안이 여야를 막론하고 잇따라 쏟아지고 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22대 국회 개원 1호 법안으로 지구당을 부활시키는 ‘지역정치 활성화법’을 5월30일 발의했고 민주당에서는 김영배 의원 역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지구당이란 국회의원 선거구 단위로 설치됐던 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2002년 일명 ‘차떼기’로 불리는 불법 대선자금 사건 이후 지구당 폐지 여론이 크게 일었고 2004년 당시 오세훈 의원의 주도로 ‘정당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민주노동당은 지구당 제도 폐지에 반발해 2004년 정당법 제3조에 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청구를 기각했다.
과거 지구당 체제에서는 원외 인사라도 후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당이 폐지된 뒤 이를 대체한 국민의힘 당협위원회나 민주당 지역위원회의 원외 위원장들은 사무실을 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원금도 모금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사무실 설치와 후원금 모집이 가능한 현역 의원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윤 의원은 지난달 30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22대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취재진과 만나 “원외 위원장들이 지역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문자도 제대로 못 보내고 당협 사무실도 만들 수 없다”며 “정치 신인의 진입 장벽을 계속 높이 쌓는 게 현재의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김영배 의원 역시 지난달 30일 ‘참여정치 활성화법’을 발의하며 “제21대 국회 전후반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를 역임하며 지구당 설치법 통과를 위해 이미 노력한 바 있다”며 “1천만 당원의 시대가 멀지않은 지금 당의 주인인 당원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자기 주권을 생활 단위에서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한 전 위원장을 만난 당선·낙선인들에 따르면 한 전 위원장은 ‘회계 감사 등 투명성 보장 장치’를 갖춘 지구당 부활 구상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뒤 한 전 위원장은 5월30일 페이스북에 “‘차떼기‘가 만연했던 20년 전에는 지구당 폐지가 ‘정치개혁’이었다. 지금은 기득권의 벽을깨고 정치신인과 청년들에게 현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구당을 부활하는 것이 ‘정치개혁’이라고 생각한다”고 논의에 불을 붙였다.
지구당 부활이 정치 영역에서의 신인과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 전 위원장의 구상을 놓고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를 위한 포석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22대 총선에서 참패한 국민의힘에는 원내보다 원외 인사들이 많기 때문에 전당대회에서 원내뿐만 아니라 원외인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이들에게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카드로 지구당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나 의원은 지난달 30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수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워크숍에서 “원외 당협위원장을 해본 사람으로서 지구당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알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돈의 문제, 비용의 문제”라고 말했다.
지구당 부활과 관련해서는 민주당에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3일 부산에서 열린 민주당 당원 콘퍼런스 행사에서 “지구당 부활도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다만 이 대표는 한 전 위원장과 다른 동기에서 지구당 부활을 언급한 것으로 분석된다. 민주당 국회의장 경선 뒤 탈당이 이어지며 당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권리당원의 권한을 늘리기 위해 지구당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또 친명(친이재명)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에서도 지구당 부활 등의 내용을 담은 이른바 ‘노회찬법’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22대 총선에서 더민주혁신회의에서만 31명의 당선인을 배출했는데 전국대회를 열고 조직 확대를 위한 움직임에 나서기도 했다.
▲ 2021년 7월12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만찬 회동을 마친 후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전 위원장과 이 대표가 오랜만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지구당 부활을 향한 여정은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 전 위원장을 지속해서 비판하는 홍준표 대구시장은 최근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세미나에 참석한 뒤 기자들을 만나 “부패정치 타파 일환으로 폐지한 건데 지금 전당대회를 앞두고 원외 위원장 표심을 노리고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홍 시장이 언급한대로 지구당은 과거 ‘돈 먹는 하마’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민주당의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 등으로 정치권에 대한 신뢰도가 여전히 낮은 상황에서 지구당 부활에 대한 여론의 반대가 커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지구당 폐지법안을 발의했던 오세훈 서울시장도 페이스북에 "여야가 함께 이룩했던 개혁이 어긋난 방향으로 퇴보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려한다"고 우려를 표했다.
오 시장은 "과거 지구당은 지역 토호의 온상이었다"며 "지구당 위원장에게 정치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지방 의원을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고, 그들은 지역 이권에 개입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지구당 부활을 주장하는 세력들에 대해 "당대표 선거에서 이기고 당을 일사불란하게 끌고 가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이 저의 판단이다"고 날을 세웠다.
지구당 부활에 관한 논의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구당 부활안에 합의했지만 선거정국에 접어들며 논의가 흐지부지됐다. 18대 국회에서는 최종합의까지 됐지만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적도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지구당 부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박원호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비즈니스포스트와의 통화에서 지구당이 과거 ‘돈 먹는 하마’로 오명을 받았던 점과 지역 토호들의 입김이 더 강해지는 점 등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더 크다고 바라봤다.
박 교수는 “지구당은 풀뿌리 민주주의 역할을 했는데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정치 신인 등용문이 많이 줄어들었다”며 “정당 외부에서 인재영입으로 정당을 운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지구당이 부활하게 되면 중앙당과 시·도당에 집중된 힘을 분산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