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현대차에 따르면 정 회장은 다음주 초 회장 취임 뒤 첫 해외출장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착공한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를 둘러보기 위한 해외방문인데 2020년 10월 회장 취임 뒤 첫 해외출장으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과 관련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기업 회장뿐 아니라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들도 첫 해외출장을 떠날 때는 상징성 등을 고려해 점유율이 높은 주력시장을 찾아 힘을 싣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 회장 역시 2018년 총괄 수석부회장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미국을 찾아 자동차 관세문제를 논의했다. 미국은 현대차그룹의 가장 큰 시장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토요타를 비롯한 일본 완성차업체의 안방으로 현대차그룹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이 2019년 기준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지역에서 판매한 자동차는 12만 대에 미치지 못한다. 같은 기간 아세안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3.4%, 현대차그룹 글로벌 판매량의 1.7% 수준이다.
더군다나 싱가포르는 1년에 판매되는 전체 자동차가 10만 대 안팎일 정도로 아세안 국가 가운데서도 자동차시장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한다.
정 회장은 코로나19 이후 아세안 시장 공략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지기 위해 취임 뒤 첫 해외출장지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아세안은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5대 완성차 메이커를 넘어 더 높이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잡아야 하는 시장으로 평가된다.
현대차그룹은 2010년 이후 꾸준히 글로벌 완성차업체 순위 5위권을 지켰으나 최근 FCA(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과 PSA(푸조시트로엥)그룹의 합병으로 5위 밖으로 밀려날 처지에 놓였다.
2019년 기준 FCA그룹와 PSA그룹은 글로벌시장에서 각각 436만 대와 318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8위와 9위에 올랐는데 이를 단순 합치면 현대차그룹(720만 대)를 밀어내고 5위에 오르게 된다.
국내시장이 이미 포화하고 미국, 유럽, 중국 등 세계 주요시장에서 글로벌 완성차업체의 경쟁이 날로 심화하는 상황에서 아세안은 현대차그룹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세안은 일본 완성차업체가 자동차시장의 80~90%를 장악하고 있어 현대차그룹 입장에서는 공략 지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완성차업체들과 경쟁해야 하는 미국, 유럽, 중국 등과 비교해 마케팅 전략 등을 짜기 한결 수월할 수 있는 셈이다.
정 회장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정 회장은 2018년 1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전시회 CES에서 기자들과 만나 “동남아시아시장을 일본차가 장악하고 있지만 확실한 차별화 전략만 세우면 점유율을 25%까지는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본 완성차업체 가운데 특히 토요타가 아세안에서 50%에 이르는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데 현대차그룹이 아세안에서 약진한다면 글로벌 2위 완성차업체인 토요타의 점유율을 빼앗아오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정부가 신남방정책으로 힘을 싣고 한류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도 현대차그룹의 아세안 진출에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아세안 지역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인구와 경제규모 등을 놓고 볼 때 미래차시장이 본격 개화한 10년 뒤면 미국과 유럽, 중국처럼 글로벌 주요 자동차시장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정 회장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두 축으로 아세안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자동차시장 규모가 작지만 아세안 10개국 가운데 가장 잘사는 나라로 미래 모빌리티시대 현대차그룹 아세안 공략의 교두보 역할을 맡는다.
현대차그룹은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에서 고객 맞춤형 전기차를 생산하며 미래차 생애주기 전반을 연구한다.
현대차그룹은 싱가포르 전동화사업 강화를 위해 지난해 싱가포르 최대 충전사업자인 SP그룹과 사업협약도 맺었다. 2018년 싱가포르업체이자 동남아시아 최대 모빌리티솔루션 플랫폼인 ‘그랩’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한 것도 아세안 지역 미래 모빌리티시장 공략의 일환이다.
▲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오른쪽 두번째)이 2019년 11월26일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인도네시아 정부와 현지 공장 건설을 위한 투자협약을 맺은 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왼쪽 두번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현대자동차>
인도네시아는 현대차그룹의 아세안 생산기지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차는 현재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델타마스 공단에 완성차공장을 짓고 있다.
연간 생산규모는 15만 대 수준인데 생산물량의 절반은 수출한다. 현대차는 향후 상황에 따라 연간 생산규모를 25만 대까지 늘리는 방안도 검토한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국가 가운데 자동차시장이 가장 큰 나라로 2019년 기준 아세안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30%가량을 차지한다. 일본 완성차업체의 점유율이 98%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현대차그룹이 아세안 공략을 위해 중요한 시장으로 평가된다.
현대캐피탈은 현대차 금융서비스 지원을 위해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현대캐피탈 인도네시아’ 현지법인도 설립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인도네시아 공장을 전략적 교두보로 활용해 성장 잠재력이 높은 아세안 진출을 본격화할 계획"이라며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를 통해서는 동남아시아 내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