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합병 논란이 국민연금을 넘어 민간 기관투자자로 번지고 있다.
삼성그룹이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국정조사의 칼끝이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투자자들의 합병찬성에도 삼성그룹이 개입했는지도 조사할 가능성이 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8일 한국거래소로부터 받은 삼성 합병관련 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내역 현황에 따르면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삼성그룹 계열사를 제외하면 국민연금에 이어 삼성물산 주식을 두 번째로 많이 보유한 곳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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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홍래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 |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삼성그룹주 펀드를 통해 삼성물산 주식 445만9598주(2.85%)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투자신탁운용이 임시주총에서 합병에 반대표를 던졌다면 찬성률은 출석주주의 66.2%에 그쳐 의결 정족수 3분의 2를 채우지 못하고 합병은 부결된다.
하지만 한국투자신탁운용이 제출한 지난해 7월13일 의결권행사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의결권행사위원장인 운용담당 임원(CIO)의 반대에도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찬성 의견을 내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 임원은 “삼성물산 경영진이 주주 입장에서 합병하기 가장 좋은 시점에 의사결정을 했는지가 가장 큰 문제”라며 반대의견을 냈다. 코어운용본부장과 주식운용본부팀장 역시 펀드운용 성과와 투자자이익을 고려할 때 반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리서치 쪽 의견은 달랐다. 합병법인의 적정가치를 25만3천 원으로 내다보고 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준법감시인, 컴플라이언스실장, 경영관리실장 등이 이에 동조하면서 7대3으로 찬성의견이 확정됐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주주확정일 기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식 5295억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병으로 받은 신주 가치를 25일 종가로 환산하면 3720억 원에 그친다. 1년여 만에 15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입은 셈이다.
제윤경 의원은 운용과 리서치의 의견이 갈릴 경우 운용부문 입장을 따르는 것이 관례인데도 합병찬성 결정을 내린 점에 주목하고 있다. 또 반대의견을 낸 운용담당 임원이 올해 초 카카오뱅크로 자리를 옮긴 점도 문제삼았다.
제 의원은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관이 전부 반대 의견을 제시했는데 투자자 이익이 최우선이어야 할 기관투자가들이 찬성에 몰표를 던졌다”며 “한국투자신탁운용의 합병찬성 과정에도 청와대의 개입이나 삼성그룹의 부정한 청탁, 외압 등이 없었는지 철저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그룹은 삼성물산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기관투자자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의혹도 제기된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24일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가 삼성미래전략실로부터 항의를 받은 사실을 밝혔다. 주 전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고서를 낸 뒤 금춘수 당시 한화그룹 경영기획실장이 전화를 걸어 ‘장충기 삼성미래전략실 사장에게 항의전화가 왔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한화투자증권은 국내 증권사 가운데 유일하게 삼성물산 합병에 부정적인 의견을 낸 곳이다. 지난해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발표 이후 국내 22개 증권사 중 한화투자증권을 제외한 21개 증권사가 합병에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합병안을 의결하는 임시주총 때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삼성물산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기관투자자 58곳 중 반대의사를 밝힌 곳은 해외 연기금 4곳뿐이었다. 나머지 기관투자자 54곳은 합병 찬성에 손을 들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기관투자자의 책임투자 확산과 스튜어드십코드의 도입속도가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책임투자는 기업의 재무적 요소뿐 아니라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소까지 고려한 투자를 말하며 스튜어드십코드는 책임있는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행동지침을 의미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스튜어드십코드 제정위원회는 최근 ‘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을 발표했다. 기관투자자가 의결권 행사 절차와 기준을 마련하고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공청회와 의견수렴을 거쳐 다음달 하순 확정안을 공표하기로 했다.
정치권에서 책임투자를 법제화하려는 노력도 나타난다. 9월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연기금의 책임투자를 강화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8월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환경, 사회, 지배구조 관련 내용을 사업보고서에 공시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책임투자 확산을 촉진시킬 것으로 보인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