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법인들이 인수합병 중개시장을 놓고 증권사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회계법인들은 외국계 투자금융(IB)회사들과 함께 인수합병 중개시장을 주도해 왔는데 증권사를 비롯한 투자중개업자만 인수합병 중개를 할 수 있는 법안이 추진되면서 자칫 위기에 몰릴 수 있게 됐다.
증권사들도 대형 투자금융회사로 발돋움하려면 인수합병 중개사업을 반드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회계법인과 일전을 벌일 채비를 갖추고 있다.
◆ 인수합병시장 놓고 회계업계와 증권업계 충돌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놓고 회계법인과 증권사 사이에 대립선전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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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금융위원회에서 투자중개업 인가를 받은 사업자만 인수합병 중개·주선이나 대리업무를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계법인들은 대개 유한회사인 만큼 이 법안이 통과되면 별도의 주식회사를 세워 금융투자업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회계법인이 비교적 적은 자기자본을 보유한 점을 감안하면 금융투자업 인가를 받는 일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회계법인의 인수합병 중개업무를 단순한 투자중개업으로 보면 곤란하다”며 “인수합병은 기업경영권을 얻기 위해 실사·세무·법률문제 해결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하는 작업”이라고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박 의원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목적으로 “회계감사를 하는 회계법인이 인수합병을 중개·주선하면 회계감사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이해도 상충될 수 있는 점을 감안해 발의했다”고 밝혔는데 이 대목을 놓고도 회계법인들은 반발하고 있다.
박대준 삼일PwC 부대표는 7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회계법인의 독립성을 높이는 법안이 통과돼 9월 말에 시행된다”며 “회계감사의 독립성에 대한 규제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증권사와 같은 기존 금융투자업자들은 자본시장법상 이해상충 방지와 같은 엄격한 규정을 적용받는데 회계사법은 그렇지 않다”며 “인수합병시장을 선진화하려면 인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박 의원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회계법인은 주요 수익원인 인수합병 중개수수료를 사실상 잃게 된다”며 “증권사들도 오래 전부터 인수합병 관련 사업을 확대하려고 시도한 만큼 서로 양보하기 힘든 다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인수합병 중개수수료 놓고 사활 걸어
국내 인수합병 중개시장은 수수료 기준으로 연간 5천억 원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대형 기업들의 인수합병이 활성화되면서 앞으로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삼일PwC, 딜로이트안진, 삼정KPMG, EY한영회계법인으로 대표되는 대형 회계법인들은 전체 매출의 30~40%를 인수합병 중개사업에서 내고 있다.
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인수합병 관련 자문수수료실적 10위 안에 한영회계법인 삼정회계법인 삼일회계법인이 이름을 올렸다. 골드만삭스나 JP모건 등 글로벌 투자금융회사와 경쟁하면서도 비교적 좋은 성과를 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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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 |
회계법인들은 2010년대 들어 감사보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인수합병 중개사업을 확대하는 데에도 온힘을 쏟고 있다.
서진석 한영회계법인 대표는 2015년에 취임한 뒤 인수합병 사업을 담당하는 거래자문본부(TAS)를 크게 강화하고 인수합병 전략컨설팅을 맡을 CFS팀을 신설했다. 박남수 전 나무코프 부사장과 윤만호 전 산은금융지주 사장 등 인수합병 사업을 지원할 인사로 영입했다.
한영회계법인은 2015년회계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에 영업이익 72억 원을 냈는데 2014년회계연도보다 80.3% 늘어났다. 인수합병 부문의 수익이 대폭 증가한 성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증권사들은 인수합병 중개시장에서 회계법인보다 상대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내 증권사들은 상반기에 진행된 인수합병 47건 가운데 3건에 대해서만 매각주간사를 맡았다.
2015년 기준으로 인수합병 관련 자문수수료실적 10위 안에 들어간 증권사는 삼성증권과 하나금융투자뿐이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6월 기자간담회에서 “증권사가 인수합병 중개·주선을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증권사가 시장의 주도권을 찾아오기 위해 자체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박용진 의원이 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증권사에게 인수합병 중개·주선시장의 주도권을 회계법인으로부터 뺏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증권사 위주로 인수합병 중개·주선사업이 이뤄져야 시장 전체의 투명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길재욱 한양대학교 교수는 7일 박용진 의원실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한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성장하려면 인수합병이 선결과제”라며 “이번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인수합병시장 규제의 투명성을 선제적으로 높일 수 있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증권사가 인수합병 중개·주선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될 경우 기업과 이해상충 문제가 더 크게 발생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회계법인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는 인수합병 과정에 필요한 돈을 기업에 빌려주거나 자금조달을 주선할 수 있는데 이쪽에서 이해상충이 일어날 소지가 더욱 크다”며 “현행 규제로도 회계감사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