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아웃도어 브랜드인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쉬나드(사진)가 4조 원이 넘는 회사 지분을 통째로 기부했다. 그는 암벽등반가로서, 사업가로서, 평생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이번 기부로 지구를 위해 자본주의가 가야할 길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파타고니아 홈페이지 갈무리> |
[비즈니스포스트] 미국의 암벽등반가 이본 쉬나드(Yvon Chouinard)가 또 한 번 지구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세계적 아웃도어 브랜드인 ‘파타고니아’의 창업자로 더욱 알려진 이본 쉬나드는 전례 없이 통 큰 기부로 파타고니아라는 기업 자체를 ‘지구를 위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자본주의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14일(현지시각) 이본 쉬나드 파타고니아 회장은 파타고니아 홈페이지를 통해 회사의 지배구조 개편을 발표했다.
회사 발표를 보면 쉬나드 회장과 일가족이 보유한 파타고니아의 모든 의결권 주식은 ‘파타고니아 퍼포즈 트러스트(Patagonia Purpose Trust)’에, 모든 비의결권 주식은 ‘홀드패스트 컬렉티브(Holdfast Collective)’에 양도된다.
파타고니아 퍼포즈 트러스트는 쉬나드 회장의 뜻에 따라 영리를 추구하지만 지구 환경 보호를 위한 영업활동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게 된다.
홀드패스트 컬렉티브는 비영리단체로 파타고니아 지분 소유에 따른 모든 배당금을 환경 위기 해결을 위한 활동과 지역 사회 활성화, 생물 다양성 보전, 자연 보호 등에 사용한다.
라이언 갤러트 파타고니아 CEO는 이번 지배구조 개편의 배경을 놓고 “2년 전 쉬나드 회장 일가는 경영진에게 환경과 사업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 구조 개발을 요구했다”며 “파타고니아가 추구해 온 ‘지구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목적을 보전하면서도 환경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더욱 많은 예산을 즉시 그리고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쉬나드 회장과 배우자, 두 자녀 등 쉬나드 일가는 파타고니아 지분의 100%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체 지분 가치는 30억 달러(한화 약 4조2천억 원)에 이른다.
이번 파타고니아의 지배구조 개편은 말 그대로 회사 전체를 기부한 셈이다.
쉬나드 회장의 기부는 그 방식에서도 전례를 찾기 어렵다.
쉬나드 회장이 회사 지분 전체를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밝히자 측근들은 지분 매각이나 기업공개 등을 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파타고니아가 비상장기업인 만큼 매각, 기업공개 등을 거치면 지분 가치가 더욱 커지고,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나드 회장은 이런 권유를 거부했다.
그는 파타고니아 홈페이지에 올린 편지에서 매각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놓고 “회사를 매입한 새 소유주가 파타고니아가 추구해 온 가치를 변함없이 추구하고 전 세계에서 일하는 파타고니아의 직원들을 계속 고용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업공개에 대해서도 “상장기업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꼭 필요하거나 회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한 장기적 계획 아래 사업을 운영하기 보다 단기적으로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쉬나드 회장은 이번 결단으로 1750만 달러(한화 약 244억 원)에 이르는 세금도 부담하게 됐다. 기부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자선 공제 등 감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우회적 방식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쉬나드 회장의 기부 방식과 규모는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와 같은 억만장자들의 기부문화가 비교적 널리 퍼진 미국에서도 이례적이다.
미국 자선사업 전문매체인 ‘인사이드 필란트로피(Inside Philanthropy)’의 창업자인 데이비드 캘러핸(David Callahan)은 쉬나드 회장의 기부를 놓고 “기부 서약서(Giving Pledge)에 서명한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많이 기부하지 않고 오히려 매년 더 부자가 된다”며 “대부분 억만장자들이 그들이 보유한 재산의 극히 일부(a tiny fraction)만 기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쉬나드 일가의 기부는 매우 특이하다(a way outlier)”고 평가했다.
쉬나드 회장은 젊은 시절부터 산에서도, 기업 경영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 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계곡의 등반로를 개척하는 등 암벽 등반가로 활동하던 쉬나드 회장은 직접 등산장비를 만들기 위해 파타고니아의 전신인 1957년 ‘쉬나드 장비’를 설립한다.
쉬나드 회장은 1972년 암벽에 박아 사용하는 등반용 쇠못인 ‘피톤’으로 암벽이 파괴돼 등반로가 망가지는 것을 발견하자 암벽에 자연스럽게 걸어 사용할 수 있는 알루미늄 초크를 개발하기도 했다.
당시 피톤은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주력제품이었지만 환경보호라는 신념을 위해 과감하게 대안제품 개발을 결단한 것이다.
쉬나드 회장은 자체적으로 ‘지구세(Earth Tax)’를 만들어 파타고니아 매출의 1%를 환경보존을 위해 사용했다. 지구세를 통한 기부는 파타고니아가 적자를 볼 때도 끊이지 않았다.
그 밖에도 유기농 면 등 친환경 원재료 사용, 막대한 직원 복지 투자 등 당시로서는 이색적 경영을 이어 왔다.
1990년대 들어서야 국제사회의 환경보호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2000년 이후에야 ‘ESG’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쉬나드 회장의 경영은 분명 시대를 크게 앞선 것이다.
쉬나드 회장은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과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귀결되는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이번 파타고니아의 지배구조 개편이 도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쉬나드 회장의 개척 정신은 한국에도 '흔적'이 남아있다.
북한산 인수봉의 ‘취나드(쉬나드의 오기) A, B’ 코스는 그가 1963년부터 약 2년 동안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던 때 산악인 선우중옥 씨와 함께 개척한 코스다. 이상호 기자